은희경
버스 타고 오며 가며 전자책으로 읽었던 책이다.
신랄하기 그지없지만 사실 사랑을 지키기 위한 예방 조치에 가까워서, 그 속에 숨어 있는 따뜻함이 언뜻 보인다.
본문
사랑하는 이유를 알 수 없을 때 비로소 사랑한다고 말해도 되는 게 아닐까.
- 오십 층 건물에서 사람이 떨어지고 있다. 그는 말한다. 아직은 괜찮아,라고. 그러나 그것은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착륙이다.
하지만 어쨌든, 아직은 괜찮다. 떨어지는 동안은.
모든 사람은 끝을 향해서 가고 있다. 누군가 스톱워치를 누르고 묻는다. 괜찮아요? 아직은요. 자, 그럼 또 시작하죠.... 그러니 걸어갈 뿐이다. 아직은 괜찮다.
너무 빈약한 근거에 만족하는 사람은 잘못 행동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너무 많은 근거를 요구하는 사람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고 위험 속에 머물게 마련이다.
희망을 가지는 건 뭔가를 믿는다는 거야.
나는 사랑의 소모를 두려워했다. 마치 광합성처럼 스스로 제 먹이를 만드는 녹색식물처럼, 햇빛을 받아들이고 물을 길어올려 자기 안에서 스스로 먹이를 만드는 사랑을 원했다. 내 몸속에서 혼자 사랑이라는 먹이를 만들고 그것을 먹으며 생존해가기를 말이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황량한 겨울 들판을 헤매며 타인을 찾아 울부짖고 싶지는 않았다.
마지막 춤의 대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상대와의 춤을 즐기는 것이 마지막 춤을 추는 방법이다.
사람은 떠나보내더라도 사랑은 간직해야 한다. 그래야 다음 사랑을 할 수가 있다. 사랑에 환멸을 느껴버린다면 큰일이다. 삶이라는 상처를 덮어갈 소독된 거즈를 송두리째 잃어버리는 꼴이다.
해설
심지어 그 눈은 한눈을 팔지도 않는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나 기대가 없기 때문이다. 상처에 고착되어 있는 아이에게 시간의 흐름이란 도돌이표나 후렴구만 있는 지루한 노래이다.
롤랑 바르트의 말처럼 사람들은 사랑받지 못했기 때문에 괴로워한다고 믿고 있지만 사실은 사랑을 받는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역시 사랑에 빠진 사람은 '살갗이 벗겨진 사람'이지 '깃털로 감싸인 사람'은 아니기 때문에 쉽게 상처받고 착각에 자주 빠지는 것이다.
그녀의 위악은 고통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미리 겪어버리는 것에 있기 때문에 그녀를 두 배로 더 아프게 한다. 은희경의 소설 속에 나오는 위악의 진정성은 그것이 고통을 준다는 사실이 아니라 이처럼 고통스러울 줄 알면서도 무릅쓰는 용기에 있다.
냉소도 끝까지 추구하면 미소가 된다.
얼마나 좋아하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달아날 수 없는가를 통해 사랑을 인정하게 하는 블랙유머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말
나는 사람들이 모두 하나의 길로만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때의 나는 주인공처럼 식물을 키우지 않았으므로 그 햇빛과 물이 저절로 주어지지 않는다는 걸 몰랐던 것이다. 물론 그때에도 나는 '자급자족형 사랑'이 허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주인공을 보란 듯이 고독 속으로 내던졌다. 그것이 허상임을 몰랐다는 게 아니라, 비유를 잘못해서 식물에게 결례를 했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