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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성민 Jul 27. 2023

뭘 해도 좋은 나이 마흔 살

좋은 삶이란?


  "저는 15년 경력의 직업상담사입니다. 그리고 올해 나이가 75세입니다. 만으로."


  한 강사 님의 강의 시작 멘트다. 15년 경력까지는 그러려니 했다. 근데 만 75세 라니, 한국 나이로 현재 77세다. 지금 하는 일을 새롭게 시작한 것은 만 60세 다. 순간 여기저기서 탄성이 쏟아졌다.


  "저 나이에 저게 되는구나."




  아내가 여성 새로 일하기 센터에서 컴퓨터활용능력 2급 교육을 받고 있다. 교육 기간 중에 센터의 사업을 소개하는 시간이 잠깐 있었는데, 그때 직업상담사 과정평가형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왔다. 집에 와서 나한테 이거 어떠냐고 물었다.


  "직업상담사? 내가? 지금 나이에 할 수 있을까? 대학도 공과대학 출신이고 지금까지 관련 경력도 없는데......"


  "아냐, 군 생활도 했지? 보험 하면서 기업 영업도 해봤지? 중간중간에 홀랜드, MBTI 검사 자격 과정 같은 것들도 들으면서 공부했지? 최근에 책 보면서 철학, 심리 같은 것도 공부했지. 이거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해. 그냥 시험 봐야 되는 거면 말 안 했을 텐데, 과정평가형이라는 게 있데. 시험 준비하면서 실무를 가르쳐주는 과정이래. 해볼 만할 것 같은데? 한번 생각해 봐."


  듣고 보니 영 아닌 말도 아니다. 지금까지 내가 해왔던 경력들을 다 활용할 수 있는 일인 것 같다. 게다가 실무를 가르쳐 주면서 바로 써먹을 수 있게 해주는 과정이라니.


  바로 구직사이트에 알아봤다. 모집하는 것도 많고 다양하다. 다만 하나 리는 게 있다.


  "급여가 거의 최저시급이네? 괜찮을까?"


  "자기야, 지금 상황을 생각해 봐. 군 생활 한 거 어디서 인정해 줘? 보험영업한 거 경력으로 봐줘? 그렇다고 대기업 갈 거야? 공무원 2~3년 험 준비해서 합격한다 해도 최저시급이야. 사업? 지금 바로 할 수 있을까? 지금 우리 상황에선 이직 준비할 때 뭐라도 하나 그레이드 해서 들어가야 되고, 경력을 다시 쌓아서 센터를 차리든 연봉을 올려서 가든 해야 되잖아. 이제 천천히 차분히 가자."


  하나하나 다 맞는 말이라 대꾸할 수가 없다. 나름대로 알아보니 직업상담이라는 일은 꽤나 보람을 느낄 수도 있는 일이고 커리어를 개발하기에 따라 발전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더구나 INFJ인 내가 그렇게 원했던 "다른 사람들을 도우면서도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일"이 될 것 같다.


  아내 덕에 묵혀뒀던 내일 배움 카드를 발급받고 자비 일부에 국비 지원받는 과정이 있어서 신청했다.




  교육받으러 왔는데 강사 님들이 하나같이 늦은 나이에 시작해서 지금까지 일을 잘하고 계신 분들이다.


  여자 강사님은 40대 후반에 시작해서 3년 만에 강사로 새로운 커리어를 만들고 있다고 했다. 전에도 교육업에서 일을 하긴 했지만 이 분야는 처음이었고 치열하게 해서 남들 10년 걸려 겪을 만한 다양한 사례를 경험했다고 했다. 그 결과를 책으로도 냈다며 부끄러운 듯 책 제목을 알려줬다.


  극강의 커리어를 보여주신 분은 만 75세의 남자 강사님이다. 공기업에서 오랫동안 일 하시고 퇴직했는데, 만 60세가 됐을 때 직업상담사로 일을 시작해서 15년째 왕성하게 활동하고 계신다. 수많은 공모전에서 신직업, 일자리 정책 제안 같은 안건으로 참가해서 매년 상도 받고 있다고 했다. 나이가 많아 컴퓨터 업이 힘들기는 한데 그래도 계속 새로운 아이디어로 콘텐츠도 만들고 있고 블로그나 카페도 운영해 봤다고 하셨다. 이제는 유튜브에 도전할 계획이란다.


  를 보고 42살이면 한창 때니까 이 분야의 전문가가 되라고, 새로 개척할 일이 많다고, 젊은 사람들이 더 열심히 해줘야 한다고 열변을 토하셨다. 자신은 변화되는 온라인 환경을 따라가질 못하니까 하고자 한다면 있는 거 없는 거 다 주겠다고 하신다. 내가 저 강사 님 나이가 되려면 아직 35년이나 남았다.




  앞으로 삶에 대한 희망이 생겼다. 뚜렷한 비전이나 목표가 세워져서 그렇다기보다 "이제는 평생직장은 없다. 직장뿐 아니라 업도 하나로 그칠 수 없는 시대다."라는 사실을 직시하게 됐고, 어떻게 그런 삶을 사는지 알게 됐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눈으로 보니 실감이 났다. 어릴 때부터 수도 없이 들었던 말이지만 누구든 쉽사리 이해하고 적응하지 못할 말이다.


  어려서 진로를 선택할 때는 빨리 기술을 배워서 평생 안정적으로 밥벌이를 하고자 했다. 14년간 군 장교로 직장 생활을 하면서 언젠가는 그만둬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유사 직업 외에는 시도할 엄두도 못 냈다. 전역하고 수많은 회사에 이력서를 내고 탈락했다. 할 수 있는 일은 영업 밖에 없다고 생각했고, 그 길로 갔다.


  마흔, 이제는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책임져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아져서 함부로 할 수가 없다고 한정지었다. 멋 모르는 어릴 때 한 번의 선택으로 모든 게 결정됐다는 절망에 빠졌다. 그저 닥치는 대로 주어지는 일이나 하면서 살아야 될 것 같았다.


  경제적 자유, 돈 많이 벌기, 투자하기 같은 데 몰두했던 것도 이거 때문인 것 같다. 일단 책임져야 할 것들을 다 처리하고 나서 하고 싶은 걸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 일단 돈이 필요했다.


  근데 돈이라는 게 하기 싫은 일을 해서는 벌리지가 않는다. 어떤 사람은 하기 싫어하는 일을 해야 돈을 번다고 하지만, 난 잘 모르겠다. 돈을 위해 하기 싫은 일을 하다가 탈이 났으니까. 또 그렇게 살다 보면 내가 뭘 좋아하는지도 잊어버리게 된다.


  근데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분을 보고 확인했다. 그렇게 살지 않아도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직업상담사. 내가. 지금 나이에 충분히 할 수 있다. 대학도 공과대학 출신이고 지금까지 관련 경력이 없어도."


  만 60세에 시작하신 저 강사 님보다 훨씬 더 좋은 조건이다. 컴퓨터도 더 잘한다. 정식 경력은 아니지만 군에서 병사들 상담했던 경험도 있다. 대학은 관련 학과를 나오지 않았어도 자격증, 독서 등으로 많이 공부했다. 나이는 말도 못 꺼낸다.


  당장 급여는 얼마 안 되겠지만 아내와 둘이 벌면 생활은 가능하다. 아이들이 아직 초등학생이라 다행이다. 앞으로 커리어를 쌓아가면 연봉은 점점 더 올릴 수 있다. 사업도 시도할 수 있다. 더구나 하기 싫은 일이 아니고, 내가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이다. 다른 사람들의 자기 발견, 진로, 직업에 관한 어려움을 돕는 일이다.



  

  경제적 자유? 난 이제 잘 모르겠다. 경제적 자유라는 말은 내가 하기 싫은 일을 빨리 끝내고 싶은 욕망 때문에 나온 말이 아닐까?


  세상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평생 하면서 살 수 있다면, 그보다 나은 삶이 있을까?


  그래서 이제 "내 삶"을 다시 시작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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