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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성민 Jul 20. 2023

"나는 누구인가"

정체성


  "지금까지 우리가 체계화하지 못한 것이 하나 있다. 우리가 누구이며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줄만한 이론이다."

- 앨빈 토플러 -




  모든 일을 그만두기로 결정하고, 아내가 말했다.


  "지금까지 고생했어. 너무 앞만 보고 달려왔어. 당분간은 괜찮으니까 이제 좀 쉬면서 하고 싶은 것도 좀 하고, 배우고 싶은 것도 좀 해. 혹시 가보고 싶었던 곳이 있으면 혼자 다녀와. 애들도 이제 말 알아들을 정도는 되니까 내가 케어할 수 있어."


  이 말을 듣고도 썩 기분 좋지 않다. 날 배려해 주는 말은 너무 고맙지만, 내 안에서 뭐가 하고 싶은지, 뭐를 배우고 싶은지, 뭐를 좋아하는지, 어디를 가고 싶은지, 하나도 생각이 안 난다. 군에 있을 때는 군인으로서, 장교로서 목표가 있었고 보험영업을 할 때도 그 나름대로 기대치가 있었다. 모든 옷을 다 벗고 나니 아무 생각이 없다. 나란 사람의 존재 자체를 모르겠다.


  일단 집에 있는 책을 집어 들고 읽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엄청 열심히 읽은 것은 아니다. 아무 일도 없이 집에만 있으니 심심하기도 하고 산책이나 운동도 하루 종일 할 수는 없으니 그저 손에 집히는 것을 들고 읽은 것이다.


  시간도 많으니 그동안 읽을 생각도 못했던 벽돌책도 읽어볼 생각이 들었다. 코스모스, 사피엔스, 호모데우스, 총균쇠, 부의 미래, 이기적 유전자, 행복의 기원, 최고의 휴식 등 한 권을 읽고 그 책에서 언급되거나 인터넷 서점에서 같이 추천되는 책들을 읽었다.


  생각보다 재밌다. 책들이 하는 말에 공통적인 메시지가 있는 듯했다. 인간이란 존재는 영원한 생명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엄청나게 뛰어난 존재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살아가는 동안 좋아하는 사람들과  하고 싶은 것, 원하는 것을 마음껏 하면서 살면 된다는 말이다. 어쩌면 공자왈 맹자왈 하는 옛말이나 종교단체 같은 데서나 할 말인 것 같은데 과학, 역사를 다루는 책들은 대부분 이런 메시지를 준다.


  그럼에도 현실로 돌아오면 적용이 안된다. 신체가 아프면 약을 먹든 수술하든 치료를 받겠는데, 공황장애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그렇다고 이렇게 계속 놀 수만은 없잖은가. TV에 나오는 연예인들이 공황장애를 앓고 몇 개월에서 몇 년 쉬다가 다시 나오고, 약을 계속 먹으면서도 방송출연하는 걸 보면 참 대단하다는 생각 밖에 안 든다. 정신과 의사는 마음을 관찰해라, 내가 지금 왜 불안해하는지 관찰을 해보고 스스로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라는 말을 하는 데 도대체가 모르겠다.



  

  우연치 않은 계기로 그 실마리를 잡을 수 있었다.


  딱히 생각나는 것도 없어서 책만 읽고 있던 중 글쓰기 수업 모집 공고를 봤다. 맨날 집에만 있는 것도 어색하고 멍 해지는 느낌이라 그냥 신청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사람들 만나러 가는 게 낙이 됐다. 글쓰기 수업을 하는 곳에서 독서모임도 했다. 아내가 추천을 해준 곳이라 믿음이 가서 독서모임도 신청했다.

  

  글쓰기 수업에서 첫 번째 과제가 나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 것이다. 글을 쓸 때는 내가 가장 잘 아는 소재로 시작해야 한다고 자신에 대한 글을 쓰라고 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내용을 썼다. 나름 담담하게 쓰려고 했는데 보는 사람들은 무겁게 느껴진단다. 무거운 기운을 빼고 빼고 또 빼려고 해도 잘 안된다. 그렇게 몇 번을 다시 쓰고 다시 쓰기를 반복하는데 문득 뭔가가 떠올랐다. 아, 내가 이렇게 살았구나, 내가 힘들었던 게 이거 때문이었구나, 글로 적다 보니 정리가 되는 것 같다. 전에도 힘든 일이 있거나 고민스러운 게 있으면 일기를 쓰곤 했는데, 그렇잖나, 그렇잖아도 힘들고 어려운 일들인데 다시 떠올리기는 더 싫은 느낌. 근데 글쓰기 과제라 자꾸 고치고 고치면서 다시 보니까 떠올리기 힘들었던 근본까지 파고들어 갈 수 있었다.


  독서모임을 하는 데, 하필 선정된 도서가 <고민하는 힘>이라는 제일교포 강상중 교수가 쓴 책이다. 일본인도 아니고 한국인도 아닌 채로 변두리에 처박혀 살면서 매 순간 정체성에 혼란을 겪었고 그것을 나름대로 정리한 책이다. 책을 읽으면서 나의 고민도 상당 부분 정리됐다. 그리고 나니 칼 융의 심리학 이론 등 그동안 읽었던 책들의 내용이 더 가깝게 다가왔다.




  글쓰기를 가르쳐 주고 독서모임에서 사회를 맡았던 40대 후반의 작가님이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같은 근본적인 질문들은 아무리 정리를 해도 시간이 지나면 바뀌는 것 같아요. 50대를 라보는 저도 아직까지 잘 모르겠어요."


  난 청소년기, 20대 때나 해야 하는 고민을 이제야 하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도 있다. 하지만 나이를 얼마나 먹든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그 시기에 맞게 다시 하게 되는 것 같다. 마흔 살을 넘은 내가 지금 이런 고민을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리라.


  그동안 승진이나 돈을 통해서 얻고자 했고, 심리검사나 상담, 사주팔자를 통해서 나를 찾으려는 노력을 했다. 어떤 방법이든 뭔가 부족한 느낌이었다. 근데 글을 쓰고 책을 읽으면서 많이 정리됐다. 글쓰기나 독서를 통해 정리하긴 했지만 결국은 그게 나의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는 경험인 것 같다.



  

  내면을 깊숙이 탐색하고 나의 어둠을 직면하면서 공황장애도 거의 완치되는 듯하다. 나는 내 안에 있다. 나를 보는 연습과 노력만이 나를 찾는 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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