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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빈 Nov 07. 2022

딱히 계획은 없는데, 퇴사는 하고 싶습니다.

뭐, 계획은 없는데,
일단 퇴사 좀 하고 생각해 보려구요.

잘 다니던 회사를 어느 날 갑자기 퇴사한다고 말하니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은 '이직 했어요?' 였다. 아무리 회사가 거지 같아도 환승이직이 디폴트 같은 요즘, 나는 요즘 사람(?) 답지 않게 계획도 없이 회사를 때려치웠다. 회사가 미치도록 싫다거나 이직을 하고 싶다거나, 그냥 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냥 회사로부터의 독립, 출퇴근하지 않는 삶을 살고 싶었다. 물론, 독립에 대한 아무런 계획은 없었다.




갑자기 계획없이 회사를 때려 치웠지만 나름의 배경이 있었다. 내가 근무했던 스타트업은 많은 스타트업들이 그렇듯 새로운 문제가 매일매일 업데이트되는 곳이었다. 새로운 문제와 프로젝트들은 쏟아졌고 내일은 또 무슨 문제가 터질까 불안불안한 하루하루가 계속되었다. 나는 모든 것에 있어 템포가 굉장히 느린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어느덧 매일매일 빠르게 치고 들어오는 새로운 문제들을 챱챱 처리하고 있었다.

눈 앞에 주어진 수많은 TO DO들을 빠르게 헤치우고 있었지만, 스스로 알게 모르게 지쳐가고 있었다. 오늘 하루 미션을 완료하고 나름대로 100% 만족스러운 하루를 살았다. 그리고 이런 하루하루가 모여 더 나아진 한 달을 살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 달의 끝에 남은 것은 우리 팀의 목표 달성률, 80%였다. 내가 100%라고 생각했던 하루가 정말 100%가 맞는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어떤 달은 팀원들과 함께 영차영차 열심히 노를 저어 100%를 초과 달성했다. 기뻤다. 피, 땀, 눈물과 고민에 대한 보상인 것 같았다. 그런데 기쁨은 잠깐이었다. 기쁨 뒤에 어느새 알 수 없는 공허함이 찾아왔다.


롤러코스터를 타는 하루하루가 계속되다 보니 어느 순간 재미있는 것들이 없어졌다. 가장 좋아했던 영화 보기, 그리고 전시회, 쇼핑, 산책, 서핑 등등 재밌던 것들이 하나도 재미있지 않았다. 뭘 해도 '이거 해서 뭐 하겠어?'라는 무기력감만 커져 갔고 술만이 유일한 낙이었다.

내가 무기력감에 방황하고 있는 동안 회사는 늘 그렇듯 빠르게 변화해 나가고 있었다. 변화의 시점마다 회사는 나에게 생각하고 있는 Next Step 무엇이고, 원하는 커리어 패스는 뭐냐고 물었고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하고 싶은 게 없었으니까.


또 한 번의 변화를 앞둔 어느 날, 우리 팀 리드가 나를 불러서 물었다.


" 로빈은 우리 회사에서 어떤 일을 하고 싶어요? "


한참의 생각 끝에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 아... 하고 싶은 일, 지금은 없는 것 같은데요. "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낸 날, 현타가 찾아왔다. 7년 간 마케터로 일하면서 늘 하고 싶은 일을 찾아 이직을 해왔다. 그러다 결국 일하고 싶었던 회사에서 하고 싶었던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더 이상은 회사에서 하고 싶은 일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케터로서 콘텐츠, 퍼포먼스, CRM, 그로스 등 다양한 분야를 맛보기처럼 경험해보았지만 한 분야의 스페셜리스트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관리자가 되어 더 큰 단위의 전략을 짜보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하고 싶은 게 없다고 생각하니 언제까지 회사를 다닐 수 있을지도 궁금했다. 회사에서 더 이상 하고 싶은 일을 찾지 못하는 내가 또 다른 회사에 간다고 해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도 알지 못했다.




30년을 넘게 열심히, 그러나 되는 대로 살아온 나는 처음으로 나라는 어떤 성질을 가진 인간일까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7년 차, 길지 않은 경력이지만 옮겨 다닌 회사는 꽤 많았다. 회사를 옮기거나 환경의 변화를 두려워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나는 그만큼 환경의 변화에 대해 유연한 사람이었다. 환경이 변화무쌍하더라도 헤쳐 나갈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있었다.

자신감이 있는 만큼 적응도 곧 잘 해냈다. 특히 일에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태연한 척, 흔들림 없이 핸들링을 꽤 잘해냈다. '문제 발생 > 어떻게 해결하지'가 로봇처럼 프로세스화 되어 있었다.

그러나 회사와 일을 위해 적극적으로 아이디어를 내고 프로젝트를 리드하는 역할은 아니었다. 나 혼자 해야하는 프로젝트라면 꾸역꾸역 해냈지만 나서거나 리드하는 건 좋아하지 않았다. 일을 하면서 떠오르는 아이디어는 많았지만 아이디어를 내면 내 일이 되는 걸 알게 된 순간부터 나는 아이디어를 차곡차곡 적재만 해두는 '소극적인 직장인'으로 지내왔다.


문득 이런 나라면 '내 것도 꽤 잘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나 혼자 일해서 나를 먹여 살려야 하는 구조라면 어쩔 수 없이 나서서 아이디어들을 현실화 할 거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 핸들링만 잘 해낸다면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봐도 근거가 터무니 없이 부족해 보이지만
'해 볼만 한데?'라는 생각이 든 순간
내 머릿 속에 독립과 퇴사라는 단어부터 떠올랐다.


결정적으로 나는 경험이 중요한 사람이다. 어떤 일이든 내가 직접 경험해 보기 전까지는 남들이 이렇더라 저렇더라하는 말들을 잘 듣지 않는다.

어떤 가설을 누구의 삶에 적용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완전히 똑같은 삶은 없기 때문이다. 각자 삶의 경험치가 다르고, 같은 문제라도 대처하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에 똑같은 결과가 나올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모든 일을 내 삶에 적용하고, 무조건 경험해 봐야 결론을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르게 말하면, 계획없이 퇴사하고 망하더라도 경험해 봐야 아는 극한의 경험주의자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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