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데쉬(l'Ardèche) 지방에서 4.
오늘은 라르졍띠에르(Largentière) 시에서 시골장이 서는 날이다.
시장을 보기에 앞서 우리는 성당 옆 주차장에 차를 세워 놓고 먼저 성당 안을 둘러보기로 했다.
프랑스의 크고 작은 옛 도심마다 성당이 자리한다. 여행객이라면 종교를 불문하고 그 지역의 역사가 깃든 성당을 방문하는 걸 빼놓을 수 없다. 흔히 유서 깊은 성당에는 유물이나 예술품이 전시되어 볼거리를 제공하지만 무엇보다 건축양식을 보는 것 또한 의미 있다. 그 양식이나 규모에 따라 도시의 시대상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모양과 방식에 따라 건축된 시기를 추정하기도 또한 경제가 번창했던 도시일수록 강한 권력과 동시에 종교적인 역할이 크고 중요하여 성당의 규모도 웅장하며 화려하다.
아! 시원하다. 성당 내부는 오늘 같은 무더위를 잠시 피하기에 더없이 좋다. 에어컨 따위 없어도 두꺼운 돌벽은 자연적 냉방 시설이나 다름없다. 성당은 고딕 양식으로 몇 점의 보물이 있다고 광고하지만 원본은 어디에 숨었는지 보이지 않고 복사된 사진만 붙여있다. 요즘 성당 유물을 겨냥한 도둑이 많다더니 설마 그 때문에 전시를 못하는 건 아니겠지?
시골장은 성당 입구에서 계단을 따라 조금 내려가면 큰 골목길부터 광장까지 이른다. 각종 액세서리나 천, 가죽으로 만든 손가방, 지갑, 인형 같은 장신구와 식탁보, 비누, 빗자루 같은 가내 생활 수공예품들이다. 그리고 올리브, 올리브유, 말린 소시지, 치즈 등 시골 농부들이 직접 재배해서 만든 지역 특산물들이 주를 이룬다. 산골의 긴긴 겨울 내내 집안에서 틈틈이 만든 것이다.
이미 많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연주자까지 길거리에 나와 여름철 축제 같다. 남쪽 시골 옛 마을들은 바캉스객이 붐비는 철에 이처럼 지방 특산물을 비롯한 노 시장이 마을행사처럼 곳곳에서 열린다. 여행객들에게 시골장은 그 지역의 특색을 잘 들어다 볼 수 있는 하나의 창구 역할도 되지만, 현지인들에게는 적지 않는 경제적 윤활유이며 활력소다.
우리는 당신 남편이 직접 재배해서 만든 올리브기름 향을 맡아보라는 중년 여성의 유혹에 이끌렸다. 깊고 진한 녹색 향내가 물씬 나는 올리브유 1L짜리 2병을 샀다. 그리고 녹색과 자주색 올리브도 샀다.
시장을 한 바퀴 돌아서 오는 길에 맛 좋은 유기농 지역특산물 식료품점으로 들어갔다. 우리와 벌써 안면을 터놓은 주인아저씨가 사교적인 농담을 유쾌하게 던진다.
아르데쉬산 건 소시지와 양 치즈, 아르데쉬산 적포도주, 과일과 채소 등을 계산대에 올려놓자 주인은 내가 고른 토마토를 두고 "이게 맛이 최고다"라며 친절하게도 자세한 설명까지 덧붙인다. "모양새는 께허 드 븝프(coeur de boeuf, 소 심장: 소 심장같이 아주 큰 토마토)와 비슷하나 종류가 다른 것으로 훨씬 맛이 좋다"라고 말한다. 나도 놓치지 않고 아는 체를 했다. "나도 알고 있거던요. 이것은 전통 토마토잖아요. 내 텃밭에서도 자라고 있어요"
사실 께허 드 븝프도 맛있는 토마토다. 하지만 전통 토마토는 신맛이 거의 없고 달콤하며 살이 찰져 깊고 그윽한 맛이 난다. 그리고 다채로운 색상에 모양, 크기가 다양해서 먹음직스러운 시각적 풍미도 준다. 솔직히 나는 '전통'이라는 단어에 더욱 매력적인 미감을 품는다.
옆에 잠자코 서 있던 남편이 "내 아내의 미각은 예민해요. 민감한 혀를 가져 포도주 감별을 나보다 잘한답니다"라고 하자, 주인아저씨는 "내 그런 줄 진즉 알아챘어요"하고 쾌적한 익살과 적절히 사교적 친절로 우리의 기분까지 즐겁게 한다.
남편이 물건값을 치르고 가득 담긴 두 개의 비닐가방을 양손에 드는 순간, ‘와장창’하고 유리병 깨지는 소리와 동시에 빨간색 액체가 바닥에서 주르륵 쏟아진다. 이런, 제기랄! 무게에 비해 비닐가방이 너무 약했나 보다. 쫘악 찢어졌다. 한병의 적포도주가 피를 토하듯이 그대로 흘러내린다.
아깝기도 하지만 도리어 바닥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주인에게도 뒤에서 기다리는 손님들에게도 민망하고 미안했다. 우리는 그들에게 폐 끼쳐 죄송하다 말하고 얼른 다른 가방에다 물건들을 주워 담았다.
그렇게 어쩔 줄 몰라하는 우리 모습을 지켜보던 여주인은 얼른 걸레와 양동이를 들고 온다. 불평은커녕 재빠르게 바닥을 닦는다. 내가 도우려 하자 "깨진 유리 조각 때문에 위험해요" "저기로 돌아가면 화장실이 있어요" 하고 오히려 내 손을 씻으라고 수돗가를 가리킨다.
그런 와중에 주인아저씨는 잠시 자리를 비우더니 큰 술통에 든 포도주를 따라 빈병에 한가득 채워서 들고 온다. 주인아저씨는 들고 온 포도주를 튼튼한 과일상자에 넣어 선물이라며 우리에게 준다.
아! 이 감동. 이것이야말로 값으로 따질 수 없는 넉넉한 남쪽 지방 르 미디(le midi)의 인심이다. 파리 같은 도시에서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시골인심이고 여유로운 삶에서 나오는 온정이다.
가게를 어수선하게 만들어 쓴 말은 아니더라도 불쾌함을 비출 만도 하건만 그런 표정은 전혀 없었다. 참으로 유쾌한 날이다.
찢어진 비닐가방 안에는 깨진 포도주뿐만 아니라 꿀병과 까시스(cassis: 까막까치 밥 나무 또는 검은 송이산 앵두라고 하는 열매로 만든 시럽: 까시스에 백포도주를 가미한 식전 주로 마심) 시럽도 들어있었지만 다행히도 무사하다.
밖으로 나오니까 햇볕이 깨진 유리병조각처럼 와장창 쏟아진다. 쨍쨍한 더위임에도 왠지 오월같이 상쾌하다. 우리는 집으로 돌아가는 날, 꼭 이 가게에 다시 들러 포도주와 꿀도 사 가자고 다짐한다.
아름다운 중세마을이 있다 하여 그곳 강에서 수영도 할 겸 서둘러 떠났다. 발라쥬끄(Balazuc) 마을이다.
낮은 산등선을 넘어 좁은 도로의 내리막길을 달린다. 저 아래로 유유히 흐르는 강물이 보이고 그 위에 현대식 콘크리트 다리가 이방인처럼 서 있다. 이 고결한 자연과 고풍스러운 마을 앞에 돌다리가 아니라서 왠지 낯설어 보인다. 건너편 절벽 위에 그 아름답다는 발라쥬끄 마을이 그야말로 입체파 작품을 보는 듯하다.
피카소가 그의 큐비즘 시대에 에스파냐의 어느 계단식 작은 마을을 기하학적으로 표현한 작품이 있다며 남편은 내게 자상하게 설명한다. 흡사 이처럼 닮았다고 한다.
벼랑을 잇대어 계단식으로 차곡차곡 지어 올린 돌집들은 마치 절벽에서 아슬하게 붙어있다는 느낌과 동시에 종이 박스를 쌓아 놓은 듯 환영 같은 대담한 모습이지만 옹기종기 실제로 사람이 살고 있는 집들이다.
아름다운 곳은 누구에게나 흥미로운 법이다.
강가 좁은 공간에 피서객이 너무 많다. 우리는 조용한 것을 좋아해서 사람이 많은 곳은 피하는 습성이 있다. 시멘트로 보수된 육중한 다리 기둥이 안타깝게도 장엄한 풍경을 싹둑 잘라 놓았다. 더구나 강에서는 예쁜 정교로운 발라쥬끄(Balazuc) 마을도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아쉬움 없이 과감히 자리를 떴다.
조용한 강가를 찾던 중, 남편은 아르데쉬 협곡의 또 다른 한 가닥 기억을 더듬어 지난번에 갔던 강 건너편으로 가자고 한다. 그곳은 도로변 쪽에 있는 강을 건너서 가운데 섬 같은 언덕을 넘으면 굽이진 강물이 반대 방향으로 꺾이어 되돌아 흘러오는 곳이다. 강을 건너고 산을 넘어야 하는 고된 번거로움에 사람 발길이 적고, 카누 카약 족들도 잠시 쉬었다 지나가는 곳이므로 늦은 오후 시간은 인적이 드문 할 것이라고 한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짧은 카누와 카약 여정의 종착지다. 장거리 카누와 카약 객들은 물살을 거꾸로 거슬러 부지런히 노를 저어대며 힘겹게 나아간다. 단거리는 하나 둘 종착한다.
아르데쉬 협곡에서 카누에 여정은 단, 중, 장거리로 3단계로 나뉘어 있다. 단거리 여정은 당일로 끝내는 게 대부분이지만, 중, 장거리는 휴게소에 정착하여 1박 또는 2박까지도 가능하다. 그만큼 길고 깊은 협곡이다.
남편이 찾았던 50년 전에는 카누에를 타고 아무 곳에서나 내려 자유롭게 캠핑을 하기도 했다지만, 그 시절이야 사정이 지금과 달라 카누에를 즐기는 사람도 극소수에 불과했었다. 지금은 안전상 이유로 관할 시에서 적당한 간격을 두고 몇 군데 설치된 휴게소에서만 숙식이 가능하다. 이 허용된 장소 외에서 불을 피우거나 음식 만들기는 모두 금지되어있다.
휴게소가 있는 곳은 강폭이 넓고 주변 경관도 멋지다. 이 곳은 널따랗게 확 트인 공간에 반원을 그리며 흐르는 강물이 수위도 높아 수영하기에 최적지라 우리도 좋아했다. 그러나 카누 카약 족들이 도착할 때의 그 소란함은 가히 공사장을 방불케 한다. 카누 카약이 도착하면서 강돌에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왁자지껄 환호성은 흡사 앵무새 떼를 방불케 한다.
여기도 우리가 원하던 목적지는 아니다. 이 강을 건너 저 앞 등성이를 넘어야 된다. 강 수치가 가장 낮은 곳을 찾아서 건너기로 했다. 그런데 낮은 곳은 그만큼 물살이 거세다. 남편은 길잡이가 되어 먼저 건너기로 했다. 한발 한발 떼고 놓을 때마다 신중을 기해야 한다. 가뭄으로 이끼가 앉아 강바닥 돌이 무척이나 미끄럽다. 남편은 내 가방을 포함한 두 개의 가방끈을 X자로 목에다 둘러 바짝 양 옆구리에 당겨서 껴안았다. 세찬 물결을 가르며 더듬거리는 발걸음에 바들바들 흔들리는 상체가 위태롭게 보인다. 말아 올린 바짓가랑이는 젖고 가르는 물살에 두 종아리가 더 가늘어 보인다. 내 여린 마음도 더 오그라든다. 다행히 그는 도착했고, 다음 카누에가 닿기 전에 나도 서둘러 건너야 한다.
강물은 내 작은 키에도 겨우 허벅지까지 오지만 거친 물살은 내 몸을 가누기도 어렵게 만든다. 대단한 물의 위력이다. 남편은 앞서 건넌 인도자답게 걸음걸음 내 발 디딜 곳을 알려준다. 덕택에 무사히 건넜다.
우리는 지름길을 따라 나지막한 산을 넘었다. 50년 전에 남편이 넘었다는 이 언덕길을 지금은 둘만이 걷고 있다. 좁고 호젓하나 반듯한 길이 있다는 것은 50년 동안에도 누군가의 발길이 꾸준히 왕래했다는 것이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그 모두가 함께든지.
길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편하고 걷기가 쉽다. 오솔길이라 고향같이 더 정겹다. 앞서간 누군가 덕분에 두렵지도 낯설지도 않다. 우리들이 산을 넘는 동안에 방금 건너왔던 저쪽 강에서 마주쳤던 카누에가 강 따라 노를 저어 여기서 다시 만났다. 마지막 지나가는 카누에다.
주위가 무서우리만큼 쓸쓸하고 고요하다. 대자연이 본연의 아름다움을 되찾는 시각.
어버이 품같이 너그러운 그러나 강하고 엄격한 강과 협곡.
뭉툭뭉툭 하얗게 깔린 강돌, S자로의 회전, 양쪽에서 잠잠히 마주하는 거대한 암벽, 우뚝 솟은 벼랑이 강물 속으로 그림자를 드리운다. 짙푸른 이끼 풀 숲이 된 물속은 감히 그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다. 오솔하다.
강물에 발을 담그자 피라미들이 쪼록 우르르 미끄러지듯 헤엄쳐 깊은 곳으로 달아난다. 많기도 하다.
미역을 감는다. 나는 물살에 떠밀려 깊숙한 곳으로 자꾸만 잠겨 든다. 얼른 되돌아 물속에서 빠져나왔다. 강가의 자갈 모래 위에 등을 대고 누웠더니 저녁 햇살이 내 빰을 할퀴고 눈을 찌른다. 그래도 밉지 않다. 따스한 온기가 등을 파고들어 피로가 한순간에 녹아내린다. 가볍다, 무중력 상태. 이 고고한 자연 속에서 나는 부표처럼 떠 있는 것인가? 내가 없다. 에고(ego)가 사라졌다. 나는 낙원에 있는 것일까? 무릉도원인가?
큰 바위 쪽으로 다시 용기를 내어 헤엄쳐 건넜다. 자연인 같은 남편을 따라 긴 나뭇가지 하나 주워 지팡이 삼아 짚고 어슬렁대며 이리저리 살피고 탐색도 한다. 큰 바위 밑에는 작은 모닥불을 피운 흔적이 있다. 멀지 않은 시간에 누군가의 작은 호기심이었나 보다. 강바닥이 낮아져 모래와 강돌이 더 큰 언덕을 이루었다. 떡갈나무 잎사귀가 가뭄으로 강모래 색보다 더 진하게 말라간다. 강돌 위를 아장 바장 걸어가는 내 발바닥에서 따뜻한 열기가 기분 좋게 차오른다.
"여기가 캠핑자리로 안성맞춤이다" 남편의 캠핑 추억담은 끝나지 않았다.
그는 원천수가 흘러내리는 곳을 향해 손짓한다. 그 옛날에도 있었고 지금도 뚜렷이 보인다. 그가 가리키는 손가락 끝을 따라가면 넝쿨나무가 벼랑을 타고 오르는 지점에서부터 강 쪽으로 수북수북 바위옷을 입고 옷고름처럼 흘러서 내려오는 곳이다. 길게 곡선을 그으며 초록길을 만들었다. 물이 통하는 길에 생명도 피어난다.
원천수가 흐르는 벼랑 아래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 같은 물속을 또다시 남편은 헤엄쳐 나아간다. 자신감이 실린 나도 뒤따른다. 팔다리로 동글동글 원을 그리면서 물속을 휘저어 가는데, 내 발끝을 가볍게 스치며 슬쩍슬쩍 간지럽히는 물고기에 온몸이 옹송그려지면서 오싹하다. 폴짝폴짝 놀란 개구리들이 강속에 잠긴 물풀 섶으로 뛰어든다.
역시 원천 수다. 생명수를 보듯 반갑게 두 손바닥을 오므려 소중히 담아서 마셔보았다. 미네랄 냄새가 난다. 우리는 바윗 등에 앉아서 산천을 둘러본다.
저 멀리 하늘에 닿은 절벽 끝에서 독수리 한 마리가 세상을 관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