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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주 Feb 11. 2022

나는 어쩌다 강아지형 인간이 되었나?

해리와 나 3


바쁜 하루를 보내고 맞은 평온한 저녁, 강아지를 쓰다듬으며 책을 읽는다. 강아지의 따뜻한 체온과 보드라운 털의 질감이 손끝으로 전해진다. 손끝으로 감각하는 이 순간 나는 생각한다. 드디어 나에게도 오랜시간 꿈에 그린 강아지가 생겼다.


포근한 기분에 취해있다 문뜩 나는 어쩌다가 이렇게 강아지를 좋아하고 강아지에게서 위안을 얻는 강아지형 인간이 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생각해 보면 우리 집에는 항상 강아지가 있었다.내 기억 속 첫 번째 나의 강아지는 바크였다. 바크는 나이가 많았고, 소형견보다는 조금 큰 믹스견이었다. 수상한 사람이 나타나면 짖어서 집을 지키라고 마당 입구에 묶어여 있던 강아지였다. 나는 그런 바크의 꼬마 주인이었다. 대문을 지나갈 때마다 “바크야, 안녕” 인사를 하면 바크는 나를 보고 꼬리를 흔들고 반가워해 주었다. 그 모습이 좋았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지금 생각해 보면 바크는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을 것 같지만 그때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바크를 좋아했지만 강아지를 마당에 묶어놓고 키운다는 것에 대해 특별한 생각을 했던 것도 아니다. 시골마을에서 내가 만난 강아지들은 모두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바크가 사라졌다. 가끔씩 집을 나가기는 했지만 저녁이 되면 돌아왔는데 그날은 날이 깜깜해지도록 바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골목 끝 우리 집 대문 앞에 앉아서 바크를 기다렸다. 골목에 완전한 어둠이 찾아오자 눈물이 났다. “바크야, 바크야.” 불러보아도 왠지 바크가 듣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무서웠다. 그때 삼촌이 나와서 말했다. “강아지들은 자기가 죽는 모습을 가족들에게 보여주기 싫어서 나이가 들면 집을 나간다.” 아무리 그래도 인사도 없이 사라진 바크가 원망스러웠지만 원래 그렇게들 작별한다는 말에 울면서 집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나의 첫 강아지 바크는 사라져버렸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야생동물 중에는 병이 들면 동족을 보호하기 위해 집을 떠나는 습성을 가진 종들이 있다고 한다. 역시 자신의 병을 알고 그 병을 가족들에게 옮기고 싶지 않아 집을 나간 것이 아닐까. 가족들을 위해 낯선 곳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았을 바크를 생각하면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든다.)

다음번 강아지는 재롱이었다. 재롱이는 털이 복슬복슬한 강아지였는데 역시 마당에서 살았고 항상 꼬질꼬질한 모습이었다. 어느 날 엄마와 사진첩을 보는데 못 보던 새하얀 강아지가 있어서 “우리 집에 이런 개도 키웠나?” 했더니 “밖에 있네.” 했던 것이 기억이 난다. 이 녀석 나름 족보 있는 강아지였다. 그러나 재롱이의 복슬복슬하고 하얀 털은 마당에 살기에는 쓸모없는 것이었다. 잔뜩 엉켜버린 털을 감당할 수 없어 가끔씩 엄마가 재단 가위로 뭉텅뭉텅 잘라주곤 했다. 재롱이는 처음에는 예민하게 굴다가 나중에는 자포자기한 모습으로 배를 뒤집고 누워있곤 했다.

재롱이는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을 줄 아는 영특한 강아지였다. 자신의 신변과 안녕에 도움이 되는 식구들을 가려 따랐고 서열이 낮은 사람에게는 별다른 감정노동을 하지 않았다. 재롱이의 그런 모습을 나는 재롱이만의 특이한 점이라고 생각했다. 모두를 반가워하는 바크와 다른 모습에 강아지들도 제각각 다르구나 하는 생각을 어렴풋이 한 것 같다. 다행히 나와는 그럭저럭 잘 지냈다. 재롱이는 그렇게 오랫동안 우리 집에서 살다가 죽었고 마당에 묻혔다.


그리고 차돌이가 있었다. 차돌이는 조금 덩치가 있는 믹스견이었는데 어쩌다 우리 집에 오게 되었다. 그전에 있던 바크와 재롱이도 좋았지만 나는 차돌이가 유난히 마음에 들었다. 물론 차돌이가 훌륭했던 것이 큰 이유겠지만 나도 자아라는 것이 형성되면서 나를 잘 따르지만 나와 다른 강아지라는 대상을 특별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 같다. 차돌이는 나의 첫 강아지 친구가 되었다.

더운 여름날 집에 아무도 없으면 나는 차돌이 목죽을 풀어 몰래 집안으로 들였다. 더운 날 마당에 혼자 퍼져 있는 강아지가 불쌍했고, 답답해 보이는 목줄을 풀어서 자유를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그렇게 차돌이와 나 사이에 작은 비밀이 생겼다. 내 의도와는 달리 차돌이는 집안에 있는 것이 편치 않은 기색이었지만 시원하고 어두운 화장실 바닥은 좋아했다. 둘이서 화장실에 앉아 쉬다가 골목에서 소리가 나면 얼른 차돌이를 내보냈다. 지금도 차돌이가 나를 바라보던 모습이 얼핏 생각난다. 그런 차돌이는 어느 날 갑자기 죽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심장사상충에 걸렸던 것이 아닌가 싶다. 차돌이가 죽었다는 것이 무척 슬펐지만 이제까지 우리집에 살던 강아지들이 그랬듯이 마당 한켠에 잘 묻어주었다.


그렇게 강아지와 함께 자라는 시간 속에서 나는 오롯이 내 존재로만 사랑받는 경험을 했다. 그리고 나와는 다른 모습이지만 나와 같이 따뜻한 체온을 가진 생명과 우정을 나누는 방법, 무언가를 돌본다는 것의 기쁨을 체득할 수 있었다. 그 시간을 통해 나는 강아지와 함께 있을 때 행복을 느끼는 강아지형 인간으로 자라났다.

물론 강아지와 기억이 모두 좋은 추억인 것은 아니다. 아주 어렸을 때 할아버지가 마당에서 키우던 도사견의 모습이 얼핏 떠오르는데 그들도 다른 강아지들과 다를 바 없는 강아지였겠지만 어쩐지 항상 나를 노려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어린 나에게는 너무 무서운 존재였다. 그것이 강아지에 대한 내 인생의 첫 기억이다. 그래서인지 강아지와 살고 있는 지금도 주둥이가 검은 큰 개에게 공포심을 느낀다. 새끼를 낳고 사납게 변해버린 강아지에게 배신감을 느꼈던 기억도 있다. 새끼들이 너무 귀여워 예뻐해주고 싶은 마음에 가까이 다가갔다가 물릴 뻔했는데 그 때문에 며칠 동안 강아지와 말도 하지 않을 정도였다.

무엇보다 싫었던 것은 강아지는 너무 빨리 또 너무 갑작스럽게 죽어버린다는 점이었다. 준비하지 못 한, 아니 준비할 수 없는 이별은 항상 강아지와 함께 왔다. 사랑하는 존재를 더 잘 돌보지 못했다는 죄책감 같은 것도 남아 있다. 우리 집을 스쳐간 많은 강아지들은 마당에 목줄을 하고 묶여 있었다. 강아지를 산책시켜야 한다는 개념은 없었고, 야외에서 키우면서 심장사상충이나 진드기 매계 질병에 대한 예방도 하지 않았고 강아지에게는 너무 짠 우리가 먹다 남은 음식들도 주었다. 가족들은 강아지를 좋아했지만 강아지가 무엇을 좋아하고 강아지를 잘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어쩌면 그게 개의 당연한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그것과 다른 강아지의 삶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개의 존재 이유는 집을 지키는 것이던 야만적인 시절이었고 나도 그런 사람들 중에 하나였다.


이제 나는 성인이 되었고 내 강아지 해리와는 이전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반려 생활을 꾸려나가고 있다. 피곤한 날에 이불속으로 파고들고 싶은 몸을 일으켜 산책을 할 때나 강아지가 어질러 놓은 것을 치울 때 “전생에 내가 너에게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러고 있냐!” 푸념을 하기도 하지만 생각해보면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나에게 사랑과 우정을 나누어준 바크, 재롱이, 차돌이 등등에게 진 빚을 이렇게 조금씩 갚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 해리가 무지개다리를 건너면 바크, 재롱이, 차돌이 등등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해리를 만난 강아지들은 “너, 우리 덕에 편하게 살았으니 이제부터 우리한테 잘해”라고 말할까. 그럼 해리는 먼저 간 어르신들의 눈치를 살피며 천진난만하게 뛰어놀고 있겠지. 그리고 다시 시간이 지나 내가 무지개다리를 건너면 모두들 함께 꼬리를 흔들며 나를 맞으러 나올 것이다.

강아지와 함께하면 행복한 나는 오늘도 강아지에게서 위안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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