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와 나 12
우리 마을로 막 이사를 왔을 때 낯선 곳에 해리와 단둘이 뚝 떨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터를 잡고 집을 짓는 동안에 수도 없이 드나들던 곳이었는데 막상 이사를 하고 보니 전혀 다른 공간으로 들어온 느낌이었다. 잘 알지 못하는 곳에 별다른 정보도 없이 굴러들어 왔다는 생각에 무슨 일이 일어날 까 괜히 긴장되고 낯선 사람들과 환경에 경계심이 들기도 했다.
다행히 내 옆에 든든한 반려견이 있었고 그 사실 하나가 나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짐 정리를 마치고 해리와 함께 앞으로 우리가 살아갈 미지의 세계가 어떻게 생겼는지, 주변의 환경은 또 어떠한지 찬찬히 살펴보기로 했다. 매일 아침과 저녁 나는 해리의 산책 줄을 단단히 잡고 그때그때 마음이 내키는 대로 길을 따라 걸었다. 마을 바깥을 둘러 난 2차선 도로와 차 한 대 지다가기도 빠듯할 정도로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 시멘트로 포장된 농로와 작은 숲으로 이어지는 흙길까지. 눈에 보이는 길이라면 모조리 들어가 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헤매다가 집으로 돌아와서 해리 밥만 겨우 챙겨주고 초저녁부터 골아떨어지는 날이 반복되었다. 피곤한 나날들이었지만 아직 가보지 않은 길들이 궁금해 다음 날 또다시 집을 나섰다.
마을 골목을 지날 때는 낯선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을까 괜히 긴장이 되고, 풀숲을 헤치고 갈 때 무언가 갑자기 튀어나오지 않을까 조마조마하고, 우리가 들어선 이 길이 막다른 길은 아니려나 신경이 곤두서기도 했지만 그 묘한 긴장감이 산책의 재미를 더해주었던 것 같다.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며 함께 걷는 걸 보니 해리도 이 탐험을 제법 좋아하는 눈치다. 그렇게 둘이서 몇 주간 마을 주변을 들쑤시고 다녔다. 그 결과 우리는 우리가 굴러들어 온 이 마을 주변의 생태를 대략적으로나마 파악할 수 있었다. 길이 어디서 어디로 이어지는지, 그 길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게 되자 앞으로 함께 산책을 다닐 루트도 그려볼 수 있었다.
우리 집 주변에는 여러 갈래의 산책 코스가 있다. 그중 가장 무난한 길은 해안을 따라 걷는 산책로이다. 우리 집은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배기에 있다. 동쪽으로 바다를 향하고 있는데 바다를 바다본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수평선이 보이는 탁 트인 바다가 펼쳐질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우리 집 앞의 풍경은 그런 바다와는 조금 다르다. 바다 건너 큰 섬(거제도)이 지척에 있어 시야를 가리기 때문이다. 바다는 수로와 같이 길고 좁은 모양을 이루고 있다. 그런 바다와 평행으로 해안산책로가 이어진다.
이 해안산책로는 제법 길어서 두 가지 루트로 나눌 수 있다. 동네 앞 빨간 등대를 중심으로 왼쪽 코스와 오른쪽 코스가 나뉜다. 아참, 이 방파제에는 여러 모로 중요한 기점이 되는데 바로 이곳이 주변을 산책하는 강아지들의 방명록이기 때문이다. 모두들 이 등대가 있는 방파제에 멈춰 서서 냄새를 확인하고 영역을 표시한다. 물론 해리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지날 때마다 그 사이 누가 왔다 갔는지 빠짐없이 꼼꼼하게 체크를 한다. 해리가 충분히 확인을 하고 사인을 보낼 때까지 나는 준비운동을 하며 기다린다.
방파제의 왼쪽 편 길은 2차선 도로 옆으로 난 보행로로 이어진다. 들쑥날쑥한 해안선을 따라 길도 구불구불하지만 오르내림이 없는 평지 길이고 왕복으로 3km 남짓 되어 가볍게 걷기 좋은 산책로이다. 길을 따라 가로등도 잘 설치되어 있어 밝을 때나 어두울 때 모두 걸을 수 있고 바다를 보며 느긋하게 산책할 수 있어서 아무래도 가장 많이 찾게 되는 길이다.
길은 조금 심심하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은 매번 달라서 지루할 틈은 없다. 맑은 물이 잔잔하게 속을 훤히 보여주는 날도 있고, 잔뜩 흐린 하늘을 본따 무겁고 불투명한 물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날도 있다. 기우는 해가 마지막 힘을 모아 바다를 물들이는 순간도, 햇빛을 닮은 윤슬이 반짝이는 순간도, 몽글몽글한 구름이 바다 위를 떠다니는 순간도 만날 수 있다. 바람이 많이 부는 날에는 바다의 표면이 하얗게 뒤집어지기도 하고, 잔뜩 몰려온 비구름이 이 모든 풍경을 삼켜버리기도 한다. 그러다 다시 날이 개면 물안개가 섬을 타고 오르는 것도 볼 수도 있다. 바람도 바다도 풍경도 꼭 같은 날은 없다.
멸치잡이 시즌에는 기선권현망 배들이 멸치 어군을 쫓아 부지런히 앞바다를 오간다. 큰 배들이 좁은 해협을 빠른 속도로 지나갈 때면 엔진이 만드는 에너지가 해안산책로를 걷는 우리에게까지 전해진다. 배가 가른 물살이 해안으로 와서 부딪히면 물보라가 일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냄새를 맡던 애꿎은 강아지가 화들짝 놀라며 엉덩이를 쭉 빼고 몸을 바짝 세운다. 그 모습을 본 나는 웃음이 터진다.
이 산책길의 유일한 단점이라면 오가는 사람들(과 강아지)이 많다는 것이다. 가끔 우리를 보고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강아지나 오토바이를 만나는 순간이면 흥분한 해리가 줄을 당겨서 예고에 없던 줄다리기를 하기도 한다. 오가는 사람 중에 강아지를 싫어하거나 무서워하는 사람들도 있기에 신경도 많이 쓰인다. 멀리서 다가오는 사람이나 물체가 보이면 가까이 오기도 전에 차도 반대편으로 건너가거나 길가로 해리를 붙여 세운 후 산책줄을 짧게 잡고 기다리게 한다. 물론 그렇게 주의를 하는데도 경계를 하며 짖어대는 강아지나 굳이 싫은 티를 팍팍 내며 멀찍이 도망가 버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럴 수 있다고 머리로는 이해가 가지만 솔직하게는 마치 우리가 바이러스라도 된 것 같다는 이상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이번에는 방파제 오른쪽으로 가 본다. 본격적으로 마을이 시작되는 곳이다. 따로 보행로는 없지만 마을 길이라 빠르게 달리는 차들이 없어 산책을 하는 데 무리는 없다. 한쪽 편에는 집들이 줄지어 있고 반대편으로는 마을 사람들이 배를 대는 작은 항구와 어촌계 작업장이 보인다.
보통은 매우 한적한 모양이지만 늦봄, 미역을 채취하는 시기가 되면 여기 정박 중인 배들이 모두 출항하여 마을 앞바다를 점점이 수놓는다. 우리 마을에서는 일 년에 한 달 남짓 전통방식으로 미역을 채취하는데 그렇게 딴 미역은 온 마을에 널어 말린다. 미역 향기가 마을을 가득 채우는 이 시기에는 구경하는 재미가 있지만 이 미역이 마을의 가장 큰 수입원이기에 눈치없게 강아지와 함께 미역 넌 곳을 배회하였다가는 마을 어르신들에게 야단을 맞기 십상이다. 그래서 미역을 따는 철이면 이 길로는 산책을 다닐 수가 없다.
항구 안쪽으로는 섬을 잇는 다리가 하나 나온다. 다리 너머는 마을 사람들은 간섬이라고 부르는 작은 섬이 있는데 아마 물이 빠지면 육지와 간간이 이어진다고 하여 붙은 이름인 듯하다. 1년에 2~3번 정도, 물이 많이 나는 날에는 조금 젖는 것만 각오한다면 정말로 걸어서도 건널 수 있을 것만 같다. 해리는 이 다리를 건너는 것을 별로 좋아하진 않는데 아마도 다리 위에서는 흥미로운 냄새가 나지 않는 모양이다. 그래도 내가 가자고 나서면 마지못해 따라온다. 내켜하지 않는 강아지를 이끌고 다리를 건너는 이유는 다리 위에 서면 마을이 한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마을이 자리 잡고 있는 언덕과 양 옆으로 펼쳐진 바다가 보인다. 바람도 시원스레 부는데 그래서 답답한 일이 있거나 괜히 마음이 울적할 때 찾게 되는 곳이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마을 풍경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조금은 넉넉해지고 그래도 이런 곳에 해리와 함께 터를 잡고 살고 있다니 다행이다 싶은 생각이 든다.
마을 주변의 길들을 느리게 걷는 우리의 산책은 특별한 만남이나 신선한 자극이 없는 단순하고 단조로운 우리의 일상과 닮아있다. 조금은 심심하다 생각될 때도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 길에는 수많은 골목들과 우회로가 있다. 이 골목과 저 골목 사이에서 조금씩 변주를 주면 매일 조금씩 다른 길을 걸을 수 있다. 길에서 만나는 풍경도, 마주치는 것들도 매번 같지 않다. 내 시선이 머무는 곳과 강아지가 유심히 냄새를 맡는 곳도 날마다 다르다. 이렇게 작은 것들을 발견하며 함께 걷는 우리의 산책 길은 수만 가지 갈래로 확장된다. 그곳에서 만나는 삶은 아직 개구쟁이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오늘은 또 어디로 가볼까, 해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