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은 조직문화 문제)
영국의 역사가이자 비평가인 토머스 칼라일은 “Speech is silver, silence is gold”라는 명제를 남겼다. 이 문장은 말을 많이 할수록 실수할 가능성도 커지므로, 말로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다는 속뜻을 담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소심하고 걱정이 많았던 나에게 침묵은 금이었다. 침묵은 언쟁을 예방하고, 대화의 상대방에겐 경청으로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침묵은 나를 보호하는 적극적인 방어막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직장생활에서 침묵은 나를 보호하지 못했다.
인사팀 재직 시절 가장 힘들었던 경험은 성희롱 사건을 조사한 일이다. 회사에서 노사공동위원회의 간사로 활동한 적이 있다. 노사공동위원회의 역할은 고용평등, 일과 삶의 균형과 관련된 사규를 제, 개정하고 위반 사례가 발생하면 심의하는 역할을 한다. 재작년, 상반기에만 두 건의 성희롱 사건이 발생했다. 피해자 입장에서 사건을 해결하려 했지만 노사공동위원회 회의에서 나의 발언권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위원장이 나의 직속 상사였기 때문이다. 피해자의 목소리를 대변하여, 피해자를 보호해야 하는 역할을 하려 노력했지만, 때때로 나를 치키기 위해 침묵을 선택했다. 유리방 실장님과 언쟁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가해자는 징계를 받았고, 피해자는 원하지 않은 자리로 보직이동이 되었다. 결국 피해자는 회사를 그만두었다.
가해자 징계 여부, 피해자의 인사발령을 결정하는 권한이 없었음에도 조사 담당자였던 나에게 책임이 돌아왔다. 피해자 구제보다 회사의 피해 축소만을 고민하며 책임을 나에게 돌리려 한 조직에 크게 실망했고, 때때로 침묵을 선택한 나에게도 실망했다. 사건이 잘 처리되지 못한 것은 나의 전문성 부족이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정말 전문성 부족 때문에 침묵했을까?
처음 내가 시도한 것은 독서였다.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내 생각을 말하기 위해서 페미니즘, 양성평등과 관련된 이론과 사례를 많이 탐독하였다. 원하는 정보를 얻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것이 정말 내가 필요한 지식인지 의문이 들었다. 성희롱 사건을 조사하고 책임을 감수했던 경험은 나의 장래에 대한 계획까지 바꿔놓았다. 조직을 위한 선택이 항상 윤리적인 선택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통감하였기에 조직윤리에 대해 배우고 싶은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또한 남성인 가해자는 감봉 후 본인 커리어에 맞는 인사가 이루어졌지만, 피해자인 여성은 원하지 않았던 보직으로 이동해야 했던 배경을 알고 싶었다. 특히 여성의 경력개발에 관한 장애 요인을 직접적으로 연구하고 싶다는 의지가 생겼고, 그런 의지는 상반기에 대학원에 진학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성희롱 사건 처리에 가장 전문적인 자격증인 노무사 시험을 준비하기로 마음먹게 되었다.
대학원에 재학 중이고, 노무사가 된 지금, 침묵의 원인이 전문성 부족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회의 자리에서 잘 알지 못해서 발언하지 못했던 경우도 있었지만, 직속 상사와의 갈등을 피하려 침묵할 때도 많았다. 실장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라기보다는 해명하는 것이 싫었다. 나의 침묵은 다분히 의도를 가진 발언의 부재였던 것이다.
두려움 없는 조직은 가능할까?
조직에서 문제가 발생할 때, 가장 손쉬운 해결방법은 문제를 일으킨 사람을 징계하는 것이다. 그 징계를 피하기 위해 직장인들은 변화보단 침묵을 선택한다. 직장인 85%는 최소한 한 번은 업무와 관련해 상사에게 문제를 제기하려다 실패한 경험이 있다고 한다. 침묵은 여러 가지 유형이 있다. 나를 보호하기 위해 침묵하거나, 어차피 변화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여 침묵하거나, 그 사람의 발언에 동조하기 위해 침묵하거나 정말 몰라서 침묵하기도 한다. 침묵이 독이 되어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같은 상황이 되면 나는 또다시 침묵을 선택할 것 같다. 당장 직면하는 상사와의 불화가 두렵기도 하지만, 나 혼자 올바른 말해서 바뀔 조직도 아니란 것을 알기 때문이다.
침묵은 문제를 해결하는 직접적인 방법이 될 수 없으나, 직장인들에게 침묵은 안정적인 선택일 수 있다. 발언을 하여 불이익을 받거나, 무시당하는 것보다는 아무 변화 없이 지내는 편이 더욱 낫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 제기해서 문제가 되는 사례를 경험한 조직에서는 침묵은 금일 수밖에 없다. 결국은 조직문화 문제인 것이다.
바람직한 조직문화란 기업이 성장할 수 있도록 생산성을 높여 스마트하게 일하는 것이나, 자율 출퇴근제, 창의적인 사무환경 등 구성원들이 만족하는 분위기를 제공하는 것만이 아니다. 나는 바람직한 조직문화란 조직의 목적과 방향을 분명하게 알고, 이를 달성하기 위한 방안을 함께 고민하는 문화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토대를 만드는 가장 중요한 자원은 바로 사람이다. 조직에서 수평적인 대화는 가능하지 않다. 그렇지만 공감과 이해는 어느 정도 가능하지 않을까? 문제를 제기한 배경,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함께 생각하고 고민했다면... 피해자는 그만두지 않았을 것이며, 나 또한 침묵하지 않고 좀 더 적극적으로 그를 보호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시 신입사원이 된 지금, 직장인 10년 차의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인지, 벌써 노무법인의 문제점이 보인다. 그럼에도 또 나는 침묵하고 있다. 조직의 관성을 깨뜨리는 그 불편함이 싫어서. 정말 두려움 없는 조직은 가능할까? 사건을 처리하는 노무사가 문제를 문제라고 하지 못하는 문화가 문제인지, 아니면 문제가 아닌데 문제라고 느끼는 내가 문제인지 아직도 헷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