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보고 느꼈다. 딸보다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을 만나야만 한다고
엄마와 나는 여자라는 단어로 묶인다. 들여다보면 그 안에 얼마나 아내로서, 엄마로서 그리고 나 자신으로서의 복잡미묘한 상황과 경험들이 뒤엉킨다. 오늘은 여자로서의 이야기다.
엄마의 여자로서의 이야기를 하려면 아빠의 이야기가 필연적이다. 아빠는 딸들을 끔찍하게 여겼다. 매년 생일을 챙겨주던 아빠는 발렌타인데이부터 화이트데이, 로즈데이, 빼빼로데이, 어린이날, 크리스마스 등 모든 기념일을 챙겼다. 물론 그 선물이 종합캔디세트 같은 투박함일지라도. 덕분에 나는 세상 모든 아빠가 이렇게 다정한 줄 알았다.
나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다정하고 모든걸 해주려는 좋은 아빠. 반면 엄마에게는 엄마를 외롭게 하는 남편이었다. 아니 그랬을거다. 그 당시에는 몰랐다. 엄마는 예민했고 아빠는 그런 엄마를 케어하는 것이 힘들어보였다.
배달 음식을 시키고 우리끼리 먼저 먹고 있으면 엄마는 토라져 방문을 쾅 닫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어딘가에 갈 때에는 아빠에게 늘 픽업과 픽드랍을 요청했다. 아빠가 피곤하다고 하면 하루 종일 토라져 우리에게도 예민하게 굴었다. 그런 날에는 엄마에게 말 걸기가 참 무서웠다.
엄마는 대체적으로 예민했고 어떤 기분을 어떻게 맞춰야 하는지를 몰랐다. 특히 아빠는 더 그랬다. 시골에서 말없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만 보고 살아온 아빠는 그게 어려웠을 거다. 할아버지는 안방의 한 곳에 앉아 늘 TV만 바라보는 분이셨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늘 앉아계시던 벽면이 노랗게 바란 것을 할머니는 하염없이 바라보시곤 했다. 아빠는 그런 환경에서 자란 사람이었다. 가족들을 위해 헌신하고 늘 묵묵히 본인의 일을 하는 것이 가장의 도리라고 생각했을 거다.
반면 엄마는 천상 여자로 살고 싶어했던 사람이라고 했다. (후에 이모에게 들었다) 학창시절 늘 인기가 많았고 엄마를 쫓아다니는 학생들이 많았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 사탕발림에 질려 묵묵한 아빠를 선택했다고 언젠가 말한 적이 있다. (나에게는 절대 묵묵한 사람을 만나지 말라는 말과 함께.)
지금처럼 MBTI라도 있다면 어떤 성향이라는 것을 서로 이해했을텐데. 얻을 정보가 없는 그 시절에는 엄마는 너무 예민했고 아빠는 딸바보에 와이프에게는 무던한 사람이었다.
엄마가 아빠와 둘이 차를 타고 가던 때에 이런 대화를 했다고 했다
"자기야. 나 만원만 빌려줘"
"왜?"
"말도 없고 택시탄 것 같잖아. 내릴 때 택시비 주고 내리게."
여러 명의 남자친구를 만나고 친구들의 다양한 연애고민을 섭렵한 지금, 엄마가 정말 외로웠을 거라는 생각이 꽤나 많이 들었다. 엄마의 입장에서 보면 아빠는 여자를 참으로 외롭게 하는 사람이었다. 나보다 딸들을 더 사랑하는 남편, 그리고 아빠를 더 사랑하는 딸들과 함께하는 생활이. 집 안에 그 누구도 내 편이 아닌듯하고, 악역이 되어버려 뒤집을 수도 없는.
그리고 얼마전 이모는 또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언니랑 같이 변호사한테 간 적이 있어. 언니 이야기를 듣는데 눈물이 펑펑 나더라. 어떻게 그렇게 살어? 우리 언니 너무 불쌍해서 내가 그 옆에서 펑펑 울었어. 언니는 그런 사람이야. 늘 말도 못하고 속으로 앓어. 그래서 나는 언니가 그렇게 사는지 진짜 몰랐어"
무슨 이야기를 들은건지 이모에게는 묻지 않았다. 단지 아빠와 관련된 이야기를 추측할 뿐.
엄마는 그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