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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박하 Apr 26. 2023

이건 엄마 꺼야

아이와의 건강한 관계를 위해 

나는 노트를 3권 정도 사용한다. 하나는 업무노트, 하나는 데일리 루틴 정리하는 다이어리, 하나는 자유롭게 쓰는 노트이다. 이 3가지 중 2가지 업무 노트와 데일리루틴을 정리하는 다이어리는 1년 내내 사용하기 때문에 신경 써서 내지부터 표지까지 꼼꼼하게 고른다. 그렇게 결정된 것이 스타벅스 다이어리와 몰스킨 어린 왕자 먼슬리 다이어리이다. (카메룬에서 어떻게 스타벅스 다이어리를 구했냐고 물어보시면 겨울에 아주 잠깐 집안일이 있어서 한국을 방문했는데 그때 지인찬스로 얻었다) 


스타벅스 다이어리도 몰스킨 다이어리도 모두 매 장마다 꼭꼭 눌러서 잘 쓰고 있었다. 그녀가 다가오기 전까지. 다행히 스타벅스 다이어리에는 낙서만 하고 도망갔는데 몰스킨 어린 왕자 다이어리는 뭐가 마음에 들었는지 들고 가서 한참 그림을 그리고 난리가 났다. 보통은 2-3일 지나면 관심이 사라져서 방바닥 어디에 내팽개쳐있어서 그냥 가져오면 됐는데 도통 돌려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러더니 결국 "이건 00이 주면 좋겠다" 라며 혼잣말을 하기 시작했다. 못 들은 척하고 있었는데 곁으로 와서는 "엄마 이거 나 주면 안돼요? 너무 예뻐요"라고 한다. 사실 처음 있는 일은 아니고 늘 내 물건을 탐내기 때문에 가끔 사용하게 해 주면 2-3일 쓰고 말곤 했다. 그런데 이 정도로 오래 가지고 있다가 달라고 하는 적은 처음인 데다 내가 너무 자주 사용하는 물건이라서 당황했다. "이걸?" 


진짜 몇 분 간 수백만 번 고민을 하다가 어린 시절 엄마 물건 다 갈취하던 내 모습이 떠올라 그냥 줘야겠다 마음먹었다. 그리고 쓰던 부분을 뜯어내라는 요구까지 받아들여서 건네주고 말았다. 순식간에 다이어리는 하얀 종이로 덮이고 고양이 노트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안에 열심히 뭘 그리는데 그냥 주길 잘했다 싶으면서도 한편으로 이제 내 물건은 없는 건가 싶었다. 


철없던 시절 엄마든 할머니든 예쁜 물건을 들고 오면 다 달라고 했다. 물론 어린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들은 받지 못했지만 가능한 것들은 대부분 흔쾌히 내어주셨다. 크면서 엄마 물건은 다 내 것이라고 생각했다. 좀 커서는 당연스럽게 엄마 옷도 엄마 책도 화장품도 다 쓸 수 있다고 생각했다. 허락은 구했지만 거절당할 거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러면서 내 물건에는 누가 손하나라도 대면 앙칼지게 행동했다. (힙합패션이 유행하던 시절이라 오빠와 옷을 놓고 엄청나게 싸웠다) 


조금 머리가 크고 나서는 그냥 문득 엄마는 왜 이렇게 다 내어줄까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오히려 좋은 물건이 들어오면 나에게 먼저 내어주는 엄마를 보며 나도 엄마처럼 저렇게 다 헌신적인 엄마가 될 수 있을까. 엄마는 좋아서 그러는 걸까 아니면 딸이니까 참아주는 걸까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변하기 시작했다. 


결혼할 때 집에서 책을 정리하고 있었다. 신혼집으로 가져갈 책 버릴 책 등등 정리하다가 가지고 가고 싶은 책이 있어 엄마 책상으로 가서 물어봤다. 나니아연대기 전합본이었다. 그러자 엄마는 잠시 망설이더니 "아니야 이건 안돼. 이건 엄마 꺼야. 너는 사서 봐"라고 말해주었다. 


순간 묘하게 서운하면서도 기뻤다. 드디어 엄마가 본인 스스로를 챙기기 시작했다는 사실과 더불어 이제 엄마는 나에게서 나는 엄마에게서 온전히 독립하라는 메시지도 함께 느껴졌다. 그날 이후로 엄마는 좋은 핸드크림을 선물 받으면 엄마가 쓴다. 2개 들어오면 가끔 나눠주기도 한다. 하지만 좋은 음식이나 물건이 들어오면 마다하지 않고 충분히 즐기는 엄마의 모습에 얼마나 안심이 되고 기뻤는지 모른다. 스스로 손해감정으로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라며 기대고 싶지 않게 스스로를 지키고 싶다는 엄마의 쿨한 속내를 이후에 듣고 더욱 감명을 받았다. 


스스로 손해감정을 쌓고 상대방에게 기대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 관계를 망치는지 모른다. 물론 그렇게 조종하고 이용해 놓고 나중에 나 몰라라 하는 것은 더 나쁘다. 모든 관계는 쌍방과실일 경우가 많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부모자식 간에는 더 그렇다. 부모 자식 간의 관계는 정말 하나도 사연 없는 집이 없다고 생각한다. 함부로 이야기하거나 일반화해서도 안된다. 그냥 나는 엄마 스스로 이제는 자식들보다 본인을 더 챙기며 노년을 보내겠다는 마음이 좋았다. 그렇다고 내가 엄마를 안 챙겨드리거나 엄마가 나를 안 챙겨주는 것은 아니다.  미묘한 마음의 차이가 관계가 얼마나 건강한지를 가르는 것 같다. 


문제의 다이어리와 아이의 흔적


아이는 가져갔던 내 노트를 지난주에 다시 들고 왔다. 자신이 찾던 예쁜 노트를 어느 구석에서 찾았다며 (하도 내 노트를 탐내서 로이텀의 핑크 노트를 하나 사줬었다) 이제 내 노트는 필요 없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겉표지를 뜯어내고 깨끗이 닦고 속지를 다시 붙였다. 그리고 아이에게 말했다. "이건 엄마꺼니까 이제 가져가면 안돼. 이건 엄마 꼭 필요한 거야"


깍쟁이처럼 엄마꺼니까 다 가져가면 안돼라고 하는 게 결코 아니다. 오늘도 내 책상에 있는 펜을 다 가져가서 아이 색연필들 사이에서 펜을 찾아 써야 했다. 정말 내 옷 빼고는 다 가져가는 것 같다. (나중에는 옷도 가져가겠지) 엄마는 이 이야기를 듣더니 깔깔 웃으며 검은색 노트를 사서 쓰면 안 가져갈 거라고 해주었다. (저도 예쁜 노트 쓰고 싶은데요.)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 수는 없지만 후에도 아이만 바라보며 울고 웃지 않고 담담히 내 인생을 꾸려가는 건강한 엄마가 되고 싶다. 너는 네 인생 살아라 이렇게 방임은 아니다. (그렇게 못한다. 엄마들은 그게 잘 안 되는 것 같다. 여기 미국엄마들 봐도 다들 굉장하다) 아이의 인생에 어떻게든 기여했다고 티를 내고 싶은 마음을 줄이고 세상에 불러내온 책임을 지며 독립적이고 건강한 아이로 키워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다. (노력이 필요하다. 정말) 내 분수에 넘치게 간섭하고 내 살 깎아먹어 가며 키워서 훗날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대신 네가 있어 행복했는데 너는 어떠했니라고 물으며 아이와의 관계를 정의 내릴 수 있으면 좋겠다. 




Image by Tim Kraaijvanger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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