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앞에서 남는 단 하나의 문장
새벽 2시 20분. 도시의 소음조차 깊은 잠에 들었던 시간, 핸드폰 알람이 귓가를 울렸고 창밖엔 검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아늑한 이불을 들춰내고, 손으로 덜 깬 눈을 부비며 일어났다.
오늘은 5·18 민주화기념행사가 있는 날이다. 대통령 후보들이 <국립 5.18 민주묘지>에 모이는 날. 나는 그 자리에 투입될 예정이었다.
눈꺼풀이 반쯤 감겨 있는 상태로 화장실로 향해 샤워기를 틀었다. 차가운 물이 세포의 감각을 하나씩 깨우고, 이내 정신이 온전히 돌아왔다.
샤워를 마치고 출근하려는 순간, 평소 같으면 깊게 잠들어 있어야 할 아내가 부스스한 머리를 쓸어 올리며 다가왔다.
“잘 다녀와.”
아내는 신발장 중문 불빛 아래에서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별거 아닌듯하면서 툭 던지는 문장, 꼬옥 안아주면서 느껴지는 아내의 체온과 숨소리가 가슴에 닿았다. 갑자기 나도 모르게 툭 하고 흘러나온 한 마디.
“고마워, 사랑해. 다녀올게.”
그 속에는 차마 다 말하지 못한 여러 가지 감정이 녹아 있다. 하지만 오늘 이 말은 나의 새벽 속에, 아니 내 인생 속에서 가장 울림이 있는 문장이었다.
기동대 버스를 타고 검은도로 위에 놓인 별빛들을 마주하며 생각에 잠겼다. 잠이 깼는지 눈을 감아도 생각만 많아지다 며칠 전 뉴스에서 본 기사가 생각난다.
미성년자들이 무면허로 차를 몰다 사고를 냈고, 마주 오던 60대 택시기사가 그 자리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 더 충격적인 건 그 직후다.
가해 청소년들이 춤을 추는 영상을 SNS에 올리며 웃고 있었고 반성과 자숙의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가 심장을 손에 쥐고 틀어막는 기분이 들었다. 택시기사의 자녀들은 어땠을까. 어떤 감정으로, 어떤 오늘을 맞이했을까.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에 닿았다. 만약 나도, 지금 이 버스에서 사고가 난다면? 버스가 뒤집히고, 차창 밖으로 튕겨 나가, 바닥에 널린 장비와 부딪히는 그 찰나의 시간 동안,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누구를 떠올리고 있을까? 생각했다.
바로 그림처럼 선명하게 떠오른 얼굴이 있다. 오늘 졸린 눈으로 나를 안아주던 아내.
단순한 배웅이 아닌 사랑을 전한 아내의 행동이었다.
이어서 허리 통증 때문에 잘 놀아주지 못한 갓난 아들, 아픈 몸을 이끌고도 병원을 혼자 다녀야 하는 어머니, 믿고 의지하던 오빠를 잃고 혼자가 된 여동생이 떠올랐다.
나는 아마, 이들에게 사랑한다고 끝내 표현하지 못한게 아쉬워 눈을 쉽게 감지 못할 것 같았다.
“아, 내가 그 말을 꼭 했어야 했는데…”
그런 후회 속에서 마지막 숨을 내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나를 오싹하게 만들었다.
우리 삶을 지배하고 속박하는 단어들 있다.
성장, 성취, 성과, 수입… 뭐 이런 것들. 중요하게 생각하며 하루를 살아왔지만, 진짜 중요한 건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 “사랑해” 혹은 “고마워”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여유?시간?>이 아니었을까? 이것이야 말로 우리가 항상 간직하고 행동해야 할 가장 본질 아닐까? 되뇌었다.
엊그제 당직근무가 끝난 오후. 후배와 함께 원조를 자칭하는 양평해장국 집에 들어갔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순댓국밥을 한 술 들며 무심한 듯 후배에게 물었다.
“너는 일 끝나고 뭐 하냐?”
“저요? 헬스장 가서 운동하거나 아니면 그냥 집에 가서 누워 쉬어요.”
“운동하고는 뭐 따로 안해? 집에서는 누워서 그냥 쉬기만 해?”
조금 낯설었다. 나는 늘 승진 아니면 자기 계발, 시간 효율, 성장 그래프 등에 목숨을 걸며 살아왔으니까. 그런데 후배는 말했다.
“형님, 전 그게 제일 행복해요. 지금도 충분히 좋아서, 뭔가 더 하려다 오히려 삶이 망가질까 봐 싫어요.”
그 말 앞에서, 멈칫했다. 그의 대답이 이제 찾은 어렴풋한 답과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평소에도 예의 바르고, 따뜻하고, 유쾌하던 후배인 걸 알기에,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진심 어린 눈빛에 "아 정말 그게 행복의 전부구나"라는 걸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
그때 더 깊숙히 깨달았다. 행복을 찾고, 찾는 만큼 불행했던 이유는 지금 이 순간을 충분히 살아내지 못하고, 언제나 ‘그다음’을 향해만 달렸기 때문이라는 것을.
지금 이 자리, 이 사람들과 재미있게 살아가는 것.
그게 삶의 전부일 수 있다는 걸, 그 순댓국집에서 나보다 10살 어린 후배에게 한 수 배웠다.
깨달음은 오늘 새벽 아내의 한마디에서 한번 더 피어나고, 기동대 버스 안에서 마주한 상상 속 죽음에서 활짝 만개했다.
그렇지만 실천하는 건 여전히 어렵다. '사랑해'라는 말은 입에 잘 붙지 않을뿐더러 낯간지럽고 거짓말하는 거 같은 기분이 든다. 정말 사랑한다고 말해야 하는 순간에만 아껴두는 무언가 같기도 하다.
그러나 사랑은, 거창하지 않다. 사랑은 “사랑해”라는 말속에만 있지 않다. 사랑은 더 나은 때를 위해 미뤄놓는 게 아니었다.
그저 졸린 눈으로 배웅하고, 사소하지만 따뜻한 말 한마디면 충분하다는 걸 아내에게 배웠다. 그래서 나는 오늘부터 바꿔보려 한다. 아주 천천히, 아주 조금씩.
어머니에게는, “엄마 목소리 들으니까 진짜 좋다.
”아내에게는, “당신이 있어서 살 맛이 나네”
여동생에게는, “요즘 진짜 힘들어 보이네, 오빠가 뭐 도와줄 거 있을까?”
친구에게는, “너 덕분에 간만에 웃었다.”
동료에게는, “너한테 오늘도 하나 배웠어 ”라고.
꼭 '사랑해'라고만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이제는 안다. 하지만 아는 걸 넘어서 실천할 때. 서툴더라도, 부끄럽더라도, 상대의 눈을 바라보며, 상대의 존재를 기억하고 표현하는 것.
그게 죽음 앞에서 깨달은 현재의 삶이고, <오늘, 지금, 표현>이 사랑의 가장 작은 용기이자 큰 실천이라는 걸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