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찔: 선생님, 안녕하셨어요? 어제 선생님과의 대화에서 문득 '사람의 본성은 어떠한가'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선생님은 끊임없이 인과 의를 강조하시지만 현실은 이와 거리가 먼 모습입니다. 선생님은 왜 인과 의를 강조하시는 것인지 그리고 현실은 왜 이와 거리가 먼 모습인지 그 근본적인 원인이 궁금해졌다고나 할까요? 사람의 본성은 어떠한 걸까요?
■ 맹: 우리 시대에 사람의 본성에 대한 논쟁이 있게 된 건, 인터뷰하는 분도 언급했지만, 현실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온갖 다양한 인간의 모습에서 자연스럽게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게 된 것이지요. 인간의 본성은 과연 어떠하길래 저토록 다양한 인간 군상의 모습을 보이는가 탐구하게 됐던 것이지요.
■ 찔: 그렇군요. 제가 알고 있기로 대략 세 가지 주장으로 그 견해가 좁혀졌다고 알고 있는데….
■ 맹: 그렇죠. 제자 공도자가 나의 주장 성선에 대해 질의하기 전 그것을 요약해 말했었죠. 성에는 선도 불선도 없다고 하는 주장, 성에는 선도 있고 불선도 있다고 하는 주장, 이 양자를 절충한 사람의 성은 선할 수도 있고 불선 할 수도 있다는 주장이 그것이죠.
■ 찔: 선생님은 무엇을 근거로 성선을 말씀하신 건지요.
■ 맹: 저들이 본 것, 즉 선과 불선의 모습은 현상일 뿐 본질이 아닙니다. 인성의 본질은 선입니다. 불선은 선을 배양하지 않고 잃어버린 데서 나온 왜곡된 현상일 뿐입니다. 시(후대의 시경)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하늘이 뭇 백성을 내시니 / 사물이 있으면 법칙이 있도다 / 백성들이 정직함은 / 이 법칙을 좋아해서로다" 이로 보아도 사람의 본성이 선하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 찔: 선생님, 아무리 불선이 선을 제대로 배양시키지 못한 데서 나온 왜곡된 현상이라 해도 사람의 본성에 불선이라는 인자가 있지 않다면 어떻게 불선이란 행동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 맹: 그건 거울의 비유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거울은 본디 깨끗하지만 관리를 하지 않으면 때가 끼어 본래의 깨끗함을 잃어버리지요. 여기서 때는 선을 배양시키지 못한 데서 나온 불선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때가 끼었다고 해도 거울의 본질은 깨끗한 것 아니겠습니까?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겠지요. 현상적으로 불선을 행한다 해도 그 본성은 선하다고 말이지요
■ 찔: 선생님의 비유는 매우 적절해 보입니다. 그러나 비유는 비유일 뿐이지 아닐까 싶습니다. 비유의 대상인 거울과 사람의 본성을 동치시켜 말할 수는 없는 것 아닐까요?
■ 맹: 좋은 지적이군요. 그것을 굳이 반박하진 않겠습니다. 사람의 본성은 해부하여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러나 우리가 사람의 본성을 논할 적에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그건 우리가 왜 인간의 본성을 논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 목적을 상실한 본성 논쟁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공허한 논쟁이 되는 것이지요. 우리는 왜 인간의 본성을 논하는 것일까요?
■ 찔: 그건, 시대의 문제를 본질적으로 이해하고 해결하기 위한 가장 기초적인 점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 맹: 잘 지적해 주셨습니다. 바로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인간의 본성을 논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인간의 본성을 논하는 데에는 교육이라는 것이 함께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본성 여하에 따라 그것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 것인지 고민해야 하기 때문이죠. 제가 성선을 주장하는 것은 현실의 불선이라는 왜곡 현상은 말 그대로 왜곡 현상이기에 이것은 바로 돌려놓을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이 가능한 것은 인간의 본성이 선하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만일 인간의 본성이 선도 아니고 불선도 아니라면 혹은 선할 수도 불선 할 수도 있다고 하면 또는 인간의 본성엔 선도 있고 불선도 있다고 하면 어떻게 확신 있게 교육할 수 있겠습니까?
■ 찔: 선생님의 성선 주장엔 그런 배경이 있었군요. 한층 선생님의 성선 주장에 공감이 갑니다. 그러나 선생님과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 맹: 앞서도 말했다시피 사람의 본성은 해부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맞았다 틀렸다는 언급 자체가 적절치 못한 것입니다. 사람의 본성에 관한 주장은 신념에 가까운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
■ 찔: 네, 잘 알겠습니다. 선생님, 순서는 좀 바뀌었습니다만 고자와의 인성 논쟁을 좀 들려주실 수 있겠는지요?
■ 맹: 고자는 성에 대한 신념이 부족했습니다. 그렇다 보니 나와의 논쟁에서 임기응변식의 대답을 했지요. 제자인 공도자가 언급했던 사람의 본성에 관한 세 가지 주장을 그때그때 자신의 주장인 양 언급했지요. 그러나 위에 말한 것처럼 그의 말이 틀리고 나의 말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아닙니다. 그럼 그 이야기를 한 번 해보지요. 한 번은 고자가 이런 말을 했어요. "맹 선생, 내 보기에 사람의 본성은 저 버드나무와 같은 것 같소이다. 무슨 말이냐면, 버드나무를 휘어 버들고리를 만들지 않소이까? 그같이 사람이 어질거나 의로운 행동을 하는 것도 그렇게 하도록 만들어서 어질거나 의로운 행동을 하는 것이지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 이외다. 버드나무를 휘지 않고 그대로 두면 결코 버들고리가 되는 법이 없지 않소이까. 사람의 본성은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니고 그저 백지와 같은 상태일 뿐이라고 보오이다. 색깔을 어떻게 물들이느냐에 따라 종이의 색이 달라지듯 사람의 행동도 어떤 식으로 유도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보오이다." 내가 답했지요. "고 선생, 좀 세밀하게 따져 보십시다. 버들고리는 버드나무의 본성을 해쳐서 만든 것입니까, 아니면 버드나무의 본성에 따라서 만든 것입니까?" 고 선생이 말했지요. "그야, 버드나무의 본성을 해쳐서 만든 것이지요." 내가 말했지요. "그렇다면 사람이 인과 의를 행하는 것도 사람의 본성을 해쳐서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선생의 말씀은 정말 위험한 말씀입니다. 선한 본성을 해쳐야 인과 의를 행할 수 있다고 하셨으니 말입니다. 인과 의는 선한 본성이 자연스럽게 발현되는 행동인데, 어떻게 선한 본성을 해쳐야 인과 의를 행할 수 있단 말씀입니까?"
■ 찔: 제가 보기에 선생님의 반박은 고자의 의도를 잘못 파악하신 데서 나온 주장 같습니다. 고자의 주장은 사람의 본성엔 선과 불선이라는 가치가 없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버드나무와 버들고리의 비유를 들은 것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이 주장에 대해서 가부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선생님의 주장 즉 성선에 바탕을 두고 고자의 주장을 반박하셨기 때문입니다. 두 분 주장의 전제 자체가 다른데 어떻게 반박이 가능하겠습니까? 동일 전제에서 다른 의견이 나왔을 때 반박이 가능한 것 아니겠습니까?
■ 맹: 흠~ 일리 있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것처럼 본성에 대한 주장은 신념의 주장이기도 합니다. 고자의 주장은 내 신념에서 봤을 때 위험하기 짝이 없는 주장이었어요. 그래서 타박하듯 말한 것이지요.
■ 찔: 이후 고자는 어떤 의견을 제시했는지요?
■ 맹: 이번에는 이렇게 말합디다. "맹 선생, 내 보기에 사람의 본성은 저 여울물과 같은 것 같소이다. 여울물을 동쪽으로 터놓으면 동쪽으로 흐르고, 서쪽으로 터놓으면 서쪽으로 흐르지 않소이까? 사람의 본성에는 선과 불선이 혼재해 있어 어느 쪽으로 방향을 잡느냐에 따라 선하게 혹은 불선 하게 행동하는 것이라고 보오이다." 나는 이렇게 답했지요. "고 선생, 이 역시 물의 본성을 가지고 따져 보십시다. 물의 본성은 무엇입니까?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이 물의 본성 아니겠습니까? 사람의 본성은 선이고 물의 본성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입니다. 물을 억지로 끌어올리면 사람의 키를 넘기거나 산을 넘기게도 할 수 있지만 그것이 물의 본성은 아닐 것입니다. 억지로 그리 된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사람이 불선을 행하게 되는 것도 형세상 부득이하여 그리된 것이지, 사람의 본성이 본디 그러해서 불선을 행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 찔: 선생님, 이번에도 기본 전제에서 차이가 나니 두 분의 견해는 논쟁이 성립될 여지가 없는 것 같습니다. 고자는 사람의 본성에는 선과 악이 혼재해 있다는 전제하에 말한 것이고, 선생님은 사람의 본성은 선이라는 전제하에 말하고 계십니다. 선생님은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이 물의 본성이라고 하시는데, 냉정히 말하면, 그것은 물의 본성이 아닙니다. 물의 본성은 H₂O 이죠. 설령 선생님의 말씀처럼 물의 본성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이라고 해도 그것이 왜 성선과 결부되는지 이해하기 곤란합니다. 그저 사람에게 본성이라는 것이 있다는 전거로 사용될 수는 있어도 말입니다. 저는 외려 고자의 비유가 더 타당성이 있어 보입니다. 고인물과 선악이 혼재 인성, 그리고 터놓은 방향에 따라서 흘러가는 물과 이끄는 방향에 따라서 달라지는 선과 불선의 행동, 이것이 훨씬 타당한 비유라고 봅니다.
■ 맹: 그런가요? 흠~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본성의 주장은 신념이란 말을 하지 않을 수 없군요. 사람의 본성엔 선과 불선 아무것도 없다는 주장이나 두 가지가 혼재한다는 주장은 고자가 본성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없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래가지고는 교육이 되지 않습니다. 비록 논리적으로는 그이 주장이 맞을지 모르지만 그의 주장엔 중요한 신념이 빠져 있어요.
■ 찔: 잘 알겠습니다. 그 후에도 고자와의 논쟁은 계속됐지요?
■ 맹: 그랬지요. 이번에 고자는 이렇게 말했어요. "사람이 태어나면서 갖는 마음, 그것이 본성 아니겠소이까? 그게 선일 수도 있고, 불선일 수도 있고, 양자가 함께 있을 수도 있고, 아무것도 없을 수도 있겠지요." 내 보기에 그는 사람의 본성에 허무적인 태도를 보여 주고 있었어요. 나는 이렇게 말했지요. "태어나면서 갖는 마음, 그게 본성이라면 그 말씀은 흰 것을 희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논리겠군요?" 그가 말했지요. "그렇소이다." 내가 말했지요. "그렇다면 흰 깃털의 흰 것과 흰 눈의 흰 것은 같다고 말할 수 있겠군요?" 그가 말했지요. "그렇소이다." 내가 말했지요. "그러면 흰 눈의 흰 것과 흰 옥의 흰 것도 같은 것이겠군요?" 그가 말했지요. "그렇소이다." 내가 말했지요." 그러면 개의 본성은 소의 본성과 같으며 소의 본성은 사람의 본성과 같은 것입니까?"
■ 찔: 선생님, 이번에도 선생님의 논리는 결함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최종 주장은 동물의 본성과 사람의 본성은 다르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동물의 본성과 사람의 본성이 꼭 다르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요? 현실적으로 드러난 모습이 다를 뿐 본성은 매한가지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러나 무엇보다 선생님 주장의 결함은 고자의 주장에 대한 올바른 반박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고자의 주장은 사람의 본성은 선인지 악인지 혹은 양자가 함께 있는지 아니면 이런 요소들이 아예 없는지 판단하기 어렵다는 것인데, 선생님의 반박은 이에 대한 반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본성은 동물의 본성과 다르다는 주장이 어떻게 고자의 주장에 대한 올바른 반박이 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의 본성에는 어떤 요소, 즉 선생님이 주장하시는 선이라는 요소가 있다고 근거를 들어 주장하셔야 올바른 반박이 되겠지요. 설령 동물의 본성과 사람의 본성이 다르다는 주장 속에 이미 그런 요소가 들어가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해도 이 역시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동물의 본성이 사람의 본성과 꼭 다르다고 주장할 근거는 없으니까요.
■ 맹: 흠~ 일리가 있는 주장이에요. 그러나 이 역시 본성에 관한 주장은 신념과 관련지을 수밖에 없는 거라는 말을 되풀이하고 싶군요.
■ 찔: 또 한차례의 논쟁이 있으셨다고 들었습니다만….
■ 맹: 그랬지요. 이번엔 이렇게 말합니다. "맹 선생, 나는 식색, 즉 먹고 싸고 사랑하는 욕구 그것이 사람의 본성이지 그 외 별다른 것이 없다고 생각하오이다. 이런 점에서 사랑하고 좋아하는 욕구[인] 이것은 내적인 것이고 옳고 그름을 가리는 판단[의] 이는 외적인 것이라 생각하오이다." 내 보기에 고자는 이제 사람의 경지를 완전히 동물의 지위로 내려놓은 것 같았소이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성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없으니 그런 지경에 이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지! 내가 그에게 말했지요. "어째서 사랑하고 좋아하는 욕구는 내적인 것이고, 옳고 그름을 가리는 판단은 외적인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건지요?" 그가 말했지요."상대가 어른이면 어른으로 대우하는데 이는 어른으로 대우하는 요소가 밖에 있기 때문이지 내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지 않소이까? 마치 흰 것을 보면 희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경우인데, 이 경우 희다고 하는 요소는 밖에 있지 내 내부에 있는 것은 아니지 않소이까? 하여 옳고 그름을 가리는 판단은 외부로부터 초래되는 것이기에 이를 외적인 것이라 말한 것 이외다." 내가 말했지요. "흰 말을 희다고 하는 것과 흰 사람을 희다고 하는 것은 차이가 없을지 모르지만, 늙은 말을 늙은 것으로 대접하는 것과 늙은 이를 노인으로 대접하는 것도 차이가 없을까요? 또 연장자 그 자체가 옳고 그름을 가리는 판단인지, 아니면 연장자로 취급하는 것 그것이 옳고 그름을 가리는 판단인지 궁금하군요?" 그러자 고자가 말했지요. "나의 아우는 사랑하고 낯선 진나라 사람의 아우에겐 관심을 두지 않으니, 이는 사랑하는 마음의 차이 때문이 아니겠소이까? 하여 사랑하고 좋아하는 욕구 이것은 내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것 이외다. 그런데 어른으로 대접하는 것은 그가 초나라 사람이든 우리 집안사람이든 어른이면 다 똑같이 어른으로 대접하니, 이는 그 대접하는 것이 어른이라는 바깥 요소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옳고 그름을 가리는 판단, 이는 외적인 것이라 생각하는 것 이외다" 내가 말했지요. "구운 고기는 진나라 사람도 좋아하고 저도 좋아합니다. 그렇다면 이 좋아하는 것은 구운 고기라는 외적 요소 때문일까요, 아니면 고운 고기를 좋아하는 사람의 내적 요소 때문일까요?"
■ 찔: 이번에는 선생님의 논리가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고자의 논리도 틀린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먹고 싸고 사랑하는 욕구 이것이 본성이라고 본 관점에서는 옮고 그름에 대한 이성적 판단은 당연히 본성으로 보기 어렵고 사랑하고 좋아하는 감정 그것이 본성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요. 그러나 사랑하고 좋아하는 감정이나 옳고 그름을 가리는 판단이나 그 모두는 내적인 데서 나오는 것이니 그 자극 요소가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는 선생님의 논리도 맞습니다.
■ 맹: 이런, 졸지에 내가 인터뷰하는 분의 판단을 받아야 하는 처지가 됐네요. 하여간 계속 얘기하지만 고자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그 어떤 확신이 없고 회의감만 가득한 사람입니다. 그래가지고는 교육이 되지 않아요!
■ 찔: 네. 선생님의 취지는 충분히 이해하겠습니다. 선생님, 오늘은 꽤 장시간 대화를 한 것 같습니다. 좀 지치시지 않는지요?
■ 맹: 아, 그만 쉬고 싶다는 말이군요. 그래요, 오늘은 좀 길었네요. 약골이신 인터뷰하는 분이 많이 피곤할 것 같군요. 내일 보기로 하죠.
■ 찔: 감사합니다, 선생님. 편히 쉬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