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날, 맞선 자리가 있었다. 호감의 기류가 꽤나 훈훈해 이후 잘 짜인 각본처럼 관계가 일사천리로 진전됐다. 그러던 어느 날 함께 걷던 그녀의 옆얼굴을 우연히 보았는데 순간 움찔했다. 목덜미와 얼굴색이 너무나 동떨어져 깜짝 놀랐던 것. 얼굴 화장이 가면처럼 느껴졌다. 그날 데이트 내내 까닭 모를 답답함이 가슴 한켠을 짓눌렀고 평소와 달리 그녀에게 별 말을 하지 않다가 일찍 헤어졌다. 평소와 다른 모습에 그녀는 의아했을 것이다.
며칠 후, 나는 어리석게도 그녀에게 화장을 안 하면 안 되겠냐고 물었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순진하고 배려 없는 말이었는지…. 당시의 나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여자의 마음을 도통 알지 못했다. 그 한마디가 그녀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갈지 전혀 헤아리지 못했던 것이다. 그녀는 별다른 대꾸 없이 침묵했다. 그날 이후 우리는 연락을 끊었다. 그러다 한참 만에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평소의 밝은 목소리와는 달리,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흘러나왔다. “싫으면 싫다고 솔직하게 말하세요!” 결국, 우리의 짧았던 인연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이상한 취향일지도 모르겠지만, 절에 가면 화려한 앞모습보다 묵묵히 서 있는 뒷모습에 더 눈길이 간다. 지난번 내소사를 찾았을 때도 그랬다. 단정하고 흐트러짐 없는 뒷모습을 보면, 설령 앞모습이 다소 소홀해 보이더라도 마음 한구석이 편안해진다. 앞모습의 부족함은 잠시의 실수나 방심일 뿐 본질은 아닐 거라는 믿음이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뒷모습이 어딘가 어수선하거나 정돈되지 않았으면, 정반대의 생각이 든다. 아무리 아름다운 앞모습일지라도 어딘가 가식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내소사의 뒷모습(사진)은 더없이 정갈했다. 그 모습에 묘한 안도감이 밀려왔고, 나도 모르게 잔잔한 미소가 입가에 번졌다.
우리는 자신의 앞모습에는 익숙하지만 뒷모습에는 그렇지 못하다. 마주할 기회도 드물거니와 특별히 관심을 두지도 않는다. 그런데 앞모습은 얼마든지 꾸미고 가릴 수 있지만 뒷모습은 그러기가 쉽지 않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알고 싶다면, 화려한 앞모습보다는 쉽게 감출 수 없는 뒷모습을 주의 깊게 살펴보는 것이 더 현명한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꾸밈없는 뒷모습 속에서, 그 사람의 진솔한 면모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어른 김장하」에서 구부정한 모습으로 조심스럽게 앞으로 손을 흔들며 설렁설렁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은, 그의 선량한 인품[남모를 선행]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듯했다.
고등학교 시절, 국어 교과서에 나온 주즈칭의 수필「아버지의 뒷모습」을 읽으며 공감했던 기억이 있다. 평소 강인하다고 믿었던 아버지가 아들을 위해 귤을 사러 가며 보인 초라한 뒷모습은 굳건함 뒤에 숨겨진 아버지의 연약함을 드러내 보인듯해 작자를 눈물짓게 했다. 권위적인 아버지 밑에서 성장한 세대라면, 이러한 감정을 한두 번쯤은 경험했을 성싶다. 어린 시절 그토록 크고 강하게 느껴졌던 아버지의 작고 쓸쓸한 뒷모습을 바라볼 때 순간 울컥하는 감정에 휩싸이지 않았던가. 아무리 무뚝뚝한 자식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고등학교 입학 후 자취방에 들르셨다가 학교의 긴 담장을 따라 구부정한 어깨로 힘없이 돌아가시던 아버지의 뒷모습은, 나이를 꽤 먹은 지금까지도,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날 내가 눈물을 흘렸는지 어땠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평소 냉정하고 엄격했던 아버지의 앞모습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그 뒷모습에 마음이 씀벅했던 것은 분명하다.
나는 왜 젊은 날 잠시 마음을 두었던 그녀에게 그토록 어리석은 질문을 던졌던 것일까? 지금도 명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함보다는 진솔한 내면을 더 선망했기에 그랬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내 자신 늘 솔직한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상대에게는 그런 점을 구하니 참으로 모순된 행동이 아닐 수 없다). 절의 화려한 앞모습보다 묵묵한 뒷모습에 더 관심을 갖는 이유 역시 이러한 나의 성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자, 이쯤 되면 궁금해할 것 같다. “그래, 지금 당신의 아내는 평소 화장을 어떻게 하시는지?” 하하. 나는 결국 화장에는 도통 관심 없는 여자와 결혼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여인은 ‘솔까’를 무척이나 좋아한다!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그녀가 집에서 가장 깨끗하게 청소하려는 공간이 바로 ‘화장실’이라는 점이다. 자신의 방은 온갖 물건으로 어지럽혀져 있어도, 이상하게 화장실 청소에는 열심이다. 한때는 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타박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래, 앞모습[자기 방]을 꾸미는 것보다 뒷모습[화장실]에 더 신경 쓰는 걸 보면, 적어도 가식적인 사람은 아니지. 그걸로 충분해!’
내일, 오랜만에 벚꽃 구경을 핑계 삼아 개심사에 들러볼 생각이다. 역시나 화려한 앞모습보다는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뒷모습을 더 관심 깊게 살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