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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빛 May 19. 2023

서서히 그림일기 6

사랑이 구체적인 언어로 다가올 때

서서히 그림일기 6, <사랑이 구체적인 언어로 다가올 때>


과연 아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가슴 깊이 새겨진 상처가 있었다. 손이 닿지 않는 마음 깊은 곳을 헤집어 놓은 것 같달까. 후에 오랜 기간 따듯한 말들과 생각들도 이 깊은 곳까지는 닿지 못했다.


지금은 한 몸으로 살고 있는 벗들에게 언젠가 내가 지나온 인생길을 나눈 적이 있다. 걸어왔던 인생길을 꽤나 긴 시간 돌아보고 정리했다. 한시간 남짓의 고백의 시간이 지나고, 벗들은 각기 마음을 담은 엽서와 선물을 전달해 줬다. 고통에 대한 이해와 새 삶에 대한 소망이 절절하게 담긴 그들의 삶의 조각을 받았다. 한품에 다 들기도 어려울 만큼, 여러 날에 나눠 받아야 할 만큼 큰 선물이었다. 무엇보다도 지난날들을 돌아보고 안녕을 빌어줄 충분한 애도의 시간을 선물 받았던 것이다.


내가 걸어왔던 걸음은 별 볼 일 없는 거라고 생각했다.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내딛기에 바빴고, 돌볼 여력이 없었다. 그런데 사랑이 담긴 무수한 손길을 통해 내가 걸어왔던 걸음들이 재해석되고 다양한 빛깔을 품게 됐다. 그때, 깊이 꺼져버렸던 마음의 밑바닥부터 채워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너무 깊어 감각마저 무뎌졌던 그곳에 밝고 따듯한 것들이 차곡차곡 쌓이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새로운 것들로 채워지고 있다는 것, 그래서 새로워질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들었던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지워지지 못할 상처는 없다는 것과 가장 큰 연고는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사랑은 존재에 대한 깊은 이해와 치열함에서 오는 것이었다. 너와 함께 하겠다는 것은 너의 지나온 과거 또한 품겠다는 것. 앞으로 네가 겪을 고통, 어지러움, 어리석음 또한 함께 돌보며 마주해 가겠다는 것. 이것이 내가 그때 느꼈던 사랑의 구체적인 언어였다. 후에도 그 사랑은 일상 속에서 구체적이고 다양한 언어로 때마다 찾아온다. 따듯한 음식이 담긴 채 다시 돌아온 그릇이나, 꾹꾹 눌러쓴 어린아이의 글씨, 나도 잊고 있었던 세심한 기억력, 함께 터뜨린 눈물 등을 통해서 말이다.


고난만이 자신의 한계를 마주하고 성숙을 이뤄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고난의 사건이 주는 힘은 실로 대단하다. 자신의 한계를 마주하게 하고 생 앞에 겸허해지게 한다. 그럴 때 살고 싶다는 생명의 간절함이 꽃피운다. 그러나 고난 그 자체에는 생명력이 없다. 고난의 무수한 생채기까지도 끌어안아 더 큰 존재로 나아가게 하는 것은 사랑이다.


이 사랑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나를 활짝 열고 삶을 던져 모험하게 하는 걸까? 이제야 사랑 안에 머물러 갈 용기가 생긴다. 잠시 사랑 앞에 무력하게 누워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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