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2학년을 마칠 무렵, 부모님이 나를 미국으로 유학 보낼 결정을 하면서 모든 일이 시작되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그 당시 한국의 부모님들은 유행처럼 자식을 해외로 유학 보내기 시작했고, 각종 매체에서 유례없는 최다 유학생 발생에 관한 기사들이 쏟아졌다. 그리고 나는 그 많은 유학생 중 하나가 되었다.
부모님과 고향을 뒤로한 채 내 몸집만 한 캐리어를 끌고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값비싼 국내 항공사 대신 훨씬 저렴한 가격의 싱가포르 에어라인을 타고 외국인들 사이에 앉아 11시간가량 비행을 거친 끝에 미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우리 집 형편은 한국에서 외동아이를 키우기 어렵지 않은, 적당한 중산층 위치였기에 지금 생각해 보면 미국 유학은 참으로 무모하고 무리한 결정이었다. 그러한 현실을 반영하듯 내가 도착한 곳은 이름만 대면 알만한 미국 대도시가 아닌 한적한 시골마을 이었다. 도로를 따라 이어지는 끝없이 펼쳐진 과수원과 농장이 처음 마주하는 미국의 풍경이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던 화려한 도심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는 더 이상 밤늦게까지 학원을 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좋았다. 그리 외향적인 성격이 아니었음에도 어려움 없이 새 학교에 적응했고 꽤 빠르게 말문이 트여 친구들과 하루 종일 수다 떠는 재미로 학교를 다녔다. 문제는 집이었다. 그 한적한 시골마을조차 한국인 학생들이 몰리는 바람에 두 명 혹은 세 명씩 방 한 칸을 나눠 써야 했고, 4인가구를 위한 집에 8인 이상 거주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드는 아이들이 사생활 없이 좁은 공간에 욱여넣어지는 것은 여러모로 좋지 않았다. 한 집에 살며 서로를 싫어하고, 갈등과 파벌이 생기고, 집이라는 공간이 불편하니 밖으로 도는 아이들이 생겼다. 다른 지역에서 유학을 하는 내 친구들 역시 비슷한 상황에 처해있었고, 유학생 하숙으로 돈벌이를 하려는 사람들의 욕심이 이런 상황을 초래한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를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사람들에게 보호자라는 명목으로 나의 안위를 맡겨야 한다는 허탈함은 반항심으로 표출되었고, 여기서는 믿고 의지할 사람이 없다는 불신과 어른답지 못한 어른에 대한 반감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못 미더운 나의 보호자라는 사람에게서, 좁고 불편한 이 집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갈 곳이 없어 묵묵히 참고 있던 나에게 같은 학교를 다니던 한국인 동생이 말을 걸어왔다. 본인은 이모 집에서 동생과 함께 거주하고 있다고 운을 떼며 그리 북적이지 않고, 나에게 1인실을 제공할 수 있으니 집을 옮기는 것은 어떠냐는 제안이었다. 다른 것보다 1인실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꿈같은 소식이라 부모님께 빠르게 알렸다.
이 선택이 매우 잘못된 것이었음을, 그래서 나와 내 부모님이 너무나 큰 손해를 입게 될 것임을 그때는 모른 채 그 동생이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도착한 그곳은 너무나도 좋아 보였다. 처음 진입해 보는 부자동네였고, 드라마 세트장처럼 크고 넓은 집이었다. 그 이모의 가족과 동생 남매 그리고 나까지 인원수는 많았지만 전혀 좁다고 느껴지지 않았고, 정말로 아담한 개인 방이 제공되었다. 화려한 겉모습에 속아 나에게 닥칠 험난한 미래를 전혀 예감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