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는 당일치기로 가족여행을 간다며 나갈 채비를 하라고 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내 미국엄마의 MBTI는 P인 것 같다. 혹은 가족이 다 그렇거나. 급작스러웠지만 나갈 채비를 했고, 차에 탑승했을 때는 꽤 이른 새벽이었던 것 같다. 우리 가족이 탑승한 차량은 고속도로에 올라 쉬지 않고 4시간을 달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출입국 할 때 LA공항을 이용했기에 LA는 종종 들렀어도 샌프란시스코는 처음이었다. 대표적인 관광코스인 금문교와 PIER 39를 둘러봤는데 그곳에 위치한 엄청 큰 초콜릿 가게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그곳에서 판매하는 럼이 들어간 초콜릿을 보자마자 한국과 미국에 거주하는 아빠들이 생각나 선물로 구입하려 했지만 미성년자는 알코올이 들어간 초콜릿을 구입할 수 없었다. 샐리는 아빠들은 선물이 없어도 이해해 줄 거라며 아쉬워하지 말라고 상심한 나를 다독였다.
당일치기로 온 즉흥 여행이라 번갯불에 콩 볶는 속도로 순식간에 훑은 샌프란시스코였지만 꽤 기억이 좋아서 한국으로 아예 돌아오기 전 비슷한 코스로 한 번 더 둘러본 기억이 있다. 그때 샐리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라며 나에게 프렌치 어니언 수프와 클램 차우더를 추천해 줬는데, 그 두 가지 음식은 1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내가 가장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는 애피타이저이자 좋아하는 수프로 남아있다. 한국에서 판매하는 곳을 볼 때마다 먹어보는데 아무리 맛있어도 추억이 담긴 맛을 이기기는 어려운 것 같았다. 가족들은 아마 모를 테지만 이 즉흥적인 샌프란스시코 당일치기는 한동안 내 기분을 가라앉게 만들었다. 여행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계속 떠오르는 전 집에서 있었던 안 좋은 기억이 원인이었다.
전에 머무른 곳에서는 그 어떤 가족행사나 외출에 나를 데려가지 않았다. 나는 항상 혼자 남아 집을 지켜야 했고, 그 수많은 날들 중 그들도 3박 4일 샌프란시스코 여행을 가느라 집을 비운 날이 있었다. 미국 법상 미성년자 혼자 집에 있으면 안 되기 때문에 나는 그 기간 동안 나와 같이 지낼 사람을 찾아야 했다. 친구들이 와준 덕분에 혼자 있는 상황은 면했지만, 여행에서 돌아온 그 여자가 본인이 어디에 뒀는지 잊어버린 물건을 나와 내 친구가 훔쳐간 것 같다고 난리를 치는 바람에 그 물건이 본인의 침대 틈 사이에서 발견되기 전까지 사흘간 갖은 의심과 독촉에 시달려야 했다. 당연히 사과 따위는 받지 못했다. 이렇게 불쾌한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그때와 180도 달라진, 지금은 너무나 좋아져 버린 상황을 마주하는 것에 괴리감이 들었다. 기분이 가라앉는 것은 결국 간극을 좁히지 못해 생긴 증상 같았다.
계속 스스로에게 그 상황에서는 이제 완전히 벗어났다고, 지금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현실에 집중하면 된다는 말을 해줬지만 나의 내면이 그 말을 오롯이 받아들이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다. 말하지 않았으니 이유는 몰랐겠지만 찰나의 불안정마저 숨기지는 못했을 텐데 그럼에도 샐리는 말없이 나를 기다려주었다. 정말 아주 가끔씩 요즘 괜찮은 지를 물어왔다. 입을 꾹 다물어버린 내가 답답할 법한데 아주 오래도록 내가 입을 떼기까지 기다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