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귀하지 못한 사람들
짧은 휴가 그리고 일상.
파도 소리에 귀를 씻고, 모래 위에 몸을 기대었다.
출렁이는 파도를 온몸으로 맞으며 즐거워하는 아이를 보고 있자니,
삶의 무게도 조금은 내려놓은 듯했다.
그러나 복귀 첫날, 모든 휴식은 한순간에 무너졌다.
사무실 문을 열자마자 내 어깨 위에 다시 얹힌 건 서류 더미가 아니라 ‘한 사람’이었다.
그녀의 말투, 그녀의 눈빛, 그녀의 기분 따라 움직여야 하는 공기.
숨 막히는 전투가 또 시작됐다.
조금만 버티면 돼. 오늘도 버텨보자.
마음의 준비를 하고, 하루를 다짐으로 시작한다.
타인으로 인해 힘들어하지 말라는 한 스님의 강연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불교심리학을 강연하시는 보만스님이다.
"타인이 뱉는 무례한 말을 받지 마세요.
그것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뱉은 사람의 것이지요."
보만스님은 말했다.
“짜증과 스트레스는 감정일 뿐이다. 실체가 없는 것에 휘둘리지 마라.”
하지만 나는 묻고 싶었다.
실체가 없다면 왜 내 심장은 매일 과속 위반을 하는가?
보이지 않는 감정이 몸을 휘감고, 보이지 않는 긴장이 내 목을 조인다.
휴가에서 가져온 평화는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매일 같은 전쟁이 다시 시작된다.
스님은 ‘감정은 공(空)’이라 말했지만, 나는 믿지 않는다.
그 사람의 한마디는 무형이지만, 나를 향한 공격은 너무도 뾰족하다.
결국, 나는 아직도 복귀하지 못한 사람이다.
내 자리는 사무실 안이지만, 내 몸은 여전히 휴가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떠나지도, 머무르지도 못한 채, 나는 오늘도 경계선 위를 걷는다.
스님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실체가 없다면, 결국 내가 미쳐가는 것도 없는 셈이니까.
SNS에서 공감되는 글을 하나 봤다.
경력직도 신입도, 똑같이 3개월짜리 인간으로 취급받는 사회.
그 짧은 시간 안에 평가받고, 대체될 수 있다는 사실.
수습은 원래 적응기간이어야 한다.
업무를 익히고, 환경에 적응하고,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이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의 회사는 그 3개월을 잘라내기 위한 시험대로 바꿔버렸다.
공정한 성과를 평가하는 것도 아니고, 진짜 능력을 보기에도 턱없이 부족하다.
그저 “쉽게 내쳐도 되는 시간”으로 제도화된 것뿐이다.
그래서 수많은 직장인들이 입사와 퇴사를 반복한다.
3개월 차.
나는 간신히 숨을 고르며 버텼다.
3개월이 지나도 평가는 계속 이어졌다.
업무 강도보다 사람 평가 강도가 더 높았다.
그것을 평가라고 할 수 있을까 싶었다.
그들의 잣대에 저울질 되는 나의 인격과 능력은
오늘도 없는 셈친다.
6개월 차.
아직도 긴장감은 풀리지 않았다.
“1년은 버틸 수 있을까?” 매일 스스로에게 묻는다.
챗 지피티와 함께,
지금 당장 괴로움에서 벗어나
새 직장을 구해 더 나은 환경을 만드는게 나은지,
1년이라는 근무 이력을 채워 성실히 임했노라 증명할 수 있는 이력을
만들고 퇴사하는 것이 더나은지에 대해 물어보았다.
전자 후자 모두 장단점이 있었다.
전자를 덮을 만한 후자가 나타난다면,
당장 그만둬라.
하지만 중요한 기준을
1년이란 시간을 증명하고자 한다면
후자도 좋다.
뾰족한 방법은 없구나,
해결책도 없구나,
내 선택 뿐이구나.
그래서 내 선택에 대한 책임이 여럿 따라 붙었다.
직장은
삶을 영위하는 공간이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직장을 두려워하며,
3개월, 6개월, 1년을 달력에 표시하며 살아간다.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회사가 준 안정은, 결국 나를 불안으로만 짓누른다.
안정을 얻기 위해 기꺼이 일하는 게 아니라,
불안을 견디기 위해 억지로 일하는 사회.
참으로 잔혹하다.
오늘도 그녀는 내 약점을 놓지 않았다.
그 지적은 나를 또 옭아맸다.
한 인터뷰가 떠올랐다.
러쉬 창업자 로웨나는 이렇게 말했다.
“실수를 하고 블랙홀로 빠져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아침이 오고, 거리를 걷고, 내일은 또 다른 날이고,
저는 또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어요.”
맞다.
우리에겐 실수하고 다시 시작할 권리가 있다.
하지만 이 권리는 창업자들 개발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권리인 것 같다.
다람쥐 쳇바퀴 안 직장인들에겐 쳇바퀴를 이탈하는 즉시 채찍만 있다. 창의적인 생각과 주도적으로 일하기를 원하는 앞서가는 시대를 따르길 바라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곳은 앞서는 이를 끌어내리는 구조.
일어서고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조차 들게 하지 않는다.
실수를 바로잡아 재건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어제보다 더 어제 같은,
그런 날의 연속이다.
더 이상, SNS에 올라오는 글들이
위안이 되지 않는다.
“상대의 그릇된 말에 상처를 입었다면,
상대의 말 때문이 아니라
그 말을 무시하지 못한 내 감정 때문일지 모릅니다.
… 누군가의 잘못된 말과 행동에는
사실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없다고 가정하면 되는 것인가?
애초에 없다고 가정하면 되는 되는 것일까?
없다고 가정하면, 문제도 사라진다고 믿는 걸까?
그런데 사라지는 건 문제의 실체가 아니라,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의 목소리다.
없다고 치자.
그럼 모든 건 편해진다.
가해자는 자유롭고, 구조는 유지된다.
그리고 피해자는 미쳐버린다.
이제 직장 내 가해자와 피해자로 나누는 것도 지겹다.
피해자는 늘 존재하는데, 가해자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없다고 가정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잔혹한 폭력이다.
책임도 없는 말을 던지고
그 말에 권위를 찾는 사람.
회의실에서, 복도에서, 단체 채팅방에서.
그 말들은 실질적 해결도, 구체적 대안도 없다.
하지만 “내가 말했다”는 사실 하나로 권력을 얻는다.
책임은 지지 않으면서, 권위만 챙긴다.
결국 누군가는 그 말의 파편을 주워 담고,
누군가는 그 말의 뒷수습을 한다.
책임 없는 권위만큼
잔혹한 것도 없다.
예를 들어, 회의에서 “우리 다 같이 힘내자” 한마디 던지고선
정작 야근은 직원 몫이 된다.
단체 채팅방에선 “고생 많으십니다~ �” 한 줄 남기고
본인은 퇴근 인증샷을 올린다.
회의실에선 “이건 다 같이 해야죠”라며 책임을 흩뿌려놓고,
실제로는 권위만 챙겨간다.
결국 남는 건 팀워크가 아니라,
뒷수습 담당자 명단뿐이다.
by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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