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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울역 Dec 06. 2018

저는 매운거 빼고 다 잘먹어요

흔한 소개팅에 대한 소회

“안녕하세요. ㅇㅇㅇ소개 받고 연락드려요.”

”퇴근은 하셨어요?”

“회사는 어느쪽 이세요?”

“그러면 수요일 퇴근하고 뵙는 걸로 할까요?”

“음식은 어떤거 좋아하세요?”


“저는 매운거 빼고 다 잘먹어요”


얼굴 한번 안본 사람한테 내 음식 취향을 읊고 있는 상황이 매번 어색하고 불편하다.


저는 부대찌개 아니면 치즈가 잔뜩 올라간 피자나, 새우 팟타이, 고수 있는 똠얌 쌀국수, 훠궈 홍탕, 생연어덮밥, 스시를 아주 좋아해요. 라고 내 뚜렷한 기호식품들을 구구절절 말하고 싶다가도, 대부분은 매운거 빼고 다 잘먹는다는 재미없고 식상한 대답을 한다.


수제햄버거는 처음 보는 사람이랑 피클이랑 소스를 질질 흘리며 먹긴 싫어 패스, 트러플 파스타는 이에 트러플이 꼈나 안꼈나를 신경 써야하니 패스, 한식은 모 아니면 도라 패스, 고깃집은 종업원이 구워주는 데 아니면 서로 어색하니 패스.


그러고나면 파스타집, 멕시칸음식점, 스시집, 와인바 정도로 좁혀지는데 개인적으로는 파스타집이 제일 무난하다. 조명도 대부분 약간 어두워서 첫만남에 딱히 부담스럽지도 않다.


한 번은 줄을 서는 맛집을 간 적이 있다. 처음 보는 남자랑 ‘그럼 회사 들어간 지는 얼마나 되셨어요?’, ‘전공은 그럼 그쪽이시겠네요?’ 등등의 신원파악을 위한 얘기들을 나누며 식당 줄을 30분 선다는 건 세상에서 제일 뻘쭘한 일이었고 다신 하고 싶지 않다. 30분이나 줄 선 맛집 치고는 맛도 잘 기억 안난다.


직장인의 소개팅이란 대개 패턴이 비슷하기 때문에 보통 금요일 저녁이나 토요일 저녁, 야근이 많이 없는 직장인이라면 수요일이나 목요일 저녁에도 많이 하는데, 그러다 보니 웬만한 파스타집은 소개팅 밭이다.


둘이 어색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존댓말을 하는 모습이 무조건 소개팅인데, 내 모습도 저렇게 보일 걸 생각하면 괜히 두리번 두리번 힐끔힐끔 안 하는게 낫다. 아는 사람만 안 만나면 된다. 하는 생각을 한다.





우리회사에서 신규 서비스를 론칭하거나, 외부로부터 투자유치를 받는다거나 등의 굵직한 변화에 대한 보도자료를 배포할 때, 보도자료보다 더 공을 들이는 게 예상 Q&A에 대한 커뮤니케이션 팩이다. 이 자료는 내부 공유용인데 기자들의 예상 질문을 아주 디테일하게 리스트업하고 그에 대한 공식적인 답변, 외부에 얘기하면 안되는 것들을 구분해 어떠한 질문이 들어와도 당황하지 않고 대응할 수 있도록 사전에 준비하는 거다.


직장인들의 대화주제가 대개 비슷하다보니 때로는 나도 모르게 예상Q&A 처럼 이미 잘 숙지된 답을 읊고 있다는 웃픈 느낌이 들 때도 있다. 나는 좋은 음악을 많이 아는 사람이나, 악기를 다루는 사람, 자유여행을 많이 다녀본 사람과의 대화가 아주 재밌다.


나는 이런 취향을 가졌고, 이런 음악을 좋아하고, 이렇게 살아온 사람이에요.를 얘기하고 서로 알아가는 과정 속에서 오히려, 아 내가 이런 사람이였구나? 하고 깨닫게 되는 ‘뜻밖의 개이득’인 경우도 있다.


H는 늘 말한다. 소개팅은 확률이라고. 그러니 모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 중에 성공할 확률도 높아지는데, 꽤나 설득력 있는 얘기라 생각한다. 꼭 확률이 아니더라도, 모수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시야가 넓어진다거나, 경험치가 쌓인다거나, 등등의 또 다른 재미도 있다. 물론,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걸 좋아하는 편인 사람에게만 해당된다.


대부분 그렇겠지만 첫만남에서의 느낌은 거의 90% 이상 맞아 떨어진다. 화기애애하게 서로 얘기를 하는 와중에도 이 사람이랑은 오늘 보고 안보겠구나 하는 느낌이나, 이 사람이랑은 잘 될 것 같다는 촉이 대부분 맞는게 신기하다.


소개팅 리얼리티 프로그램 ‘선다방’을 보면 남녀가 소개팅을 한 뒤 각자에게 상대를 다시 볼 의향이 있냐고 묻는데, 시청자들은 남녀 각자의 마음을 동시에 볼 수 있으니 말 그대로 ‘꿀잼’ 이다. 서로 백프로 호감인 듯 했는데 사실은 한 쪽이 상대를 다시 볼 의향이 없었다거나. 시청자로서는 예상 못한 결과이지만 사실 소개팅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들이다.


여러가지 변수를 제외하고 단순하게 생각하면 상대가 상대를 맘에 들어할 확률은 각각 1/2, 1/2 이고 둘다 서로가 맘에 들 확률은 1/4 밖에 안된다.




한 번은 나한테 아버지가 정년퇴직 하셨냐고 대뜸 묻는 남자가 있었다. 그런 질문을 당당하게 하는 사람을 처음 봐서 너무 당황했으나 나도 모르게 술술 친절하게도 대답해줬다. 그 다음 질문은 주식은 하냐, 적금은 많이 했냐, 내 연봉까지 물어볼 기세로 아주 가관이었다.


한 번은 전 남자친구와 왜 헤어졌냐 물어보는 사람도 있었는데, 본의 아니게 서로의 전 연애를 돌아보며 상담까지 해준 세상 쓸데없는 소개팅이었다.


또 한 번은 나이가 5살 넘게 차이나는 남자였는데 처음 보고나서 두번째부터 자연스럽게 오빠가~ 오빠는 말야~ 이러면서 말을 은근슬쩍 놓는 거다. 유독 나이 가지고 유세를 떠는게 어이가 없었지만 꽤 적극적으로 나오는 데다가 취향도 비슷해 몇 번 만났는데, 한달 쯤 돼서였나. 나보고 ‘엄마가 선 보라는데 보고 와도 돼? 숨기려 했는데 말해야 할 것 같아서’라는 개똥 같은 소리를 투척해 그대로 영영 사라졌다.


스무살 때는 랩을 취미로 하는 친구와 소개팅을 하게 됐는데, 본인이 만든 자작랩을 들려준다고 코인노래방에 굳이 데려가 그 당시 한창 유행한 아웃사이더 비트에 자작랩을 씌워 들려줬다. 웃음이 나오는 걸 겨우 참고 끝까지 들었던 기억이 난다.




오래된 친구 S는 스무살 무렵 소개팅을 하러 가는데 단체 카톡방에 ‘야.... 남자가 고깃집 가자는데 나 신발에 지금 땀찼어... 올리브영 가서 발에 향수라도 뿌려야 되냐...’라고 했던 웃픈 에피소드가 있다. 향수를 진짜 뿌렸는지는 모르겠고 그 남자랑은 잘 안됐다.


친한 언니 H는 한창 소개팅이 몰리던 때 하루에 두개의 소개팅이 연달아 있었는데 두 개를 일부러 한 장소로 잡았다. 종각역 3번출구에서 첫번째 남자랑 만나 소개팅을 하고 헤어진 담에 다시 종각역 3번출구에서 두번째 남자랑 소개팅을. 이 얘기를 들으며 두번째 남자랑 소개팅을 하는 모습을 첫번째 남자가 우연히 보게된다면? 하는 쓸데없는 상상을 했다.


또 다른 언니 S는 몇 년을 사귄 남자친구와 대판 싸우고 열 받아서 홧김에 소개팅에 나갔는데 크게 현타가 와서 남친에게 바로 돌아가 지금은 결혼까지 했다. 구관이 명관이라는 옛 말이 딱 맞아 떨어지는 경우다.


대학친구 P는 아직 인사도 안한 소개팅남에게 카톡이 띡 왔다고 한다. “예뻐?” 주선자한테 보내야 할 카톡을 소개팅녀에게 보내버린 거다. 친구가 하도 어이가 없어서 물음표 하나 보냈더니 횡설수설 말도 안되는 변명을 늘어 놓았고. 그대로 영구 차단행. 차라리 좀 모지리 이미지로 센스있게 대처했으면 귀엽기라도 했을텐데. 그 남자에겐 꽤 오래 흑역사로 남았을 거다.


친한 언니 P는 소개팅 남이랑 첫 만남에 술을 거하게 마셨는데, 남자가 술 먹는 내내 적극적으로 호감도 표시하고 심지어는 헤어질 때 버스 정류장에서 볼뽀뽀를 쪽 하더랬다. 게다가 집에 가서 곱게 씻고 누워 잘 들어갔냐고 영상통화까지 거는 진상을 부리셨는데, 그러고는 다음 날 숙취와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술 취한 남자의 뽀뽀는 믿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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