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가장 존경하는 단 한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나는 바로 아빠라고 외칠 것이다. 그리고 아빠에 대한 에피소드를 마구 늘어놓겠지. 사춘기 시절 엄마와 싸우고 울고 있는 나에게 진심으로 다가와 공감하고 조언해 준 기억을 아직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노라고, 방에 모기 한 마리라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딸 방에서 그 모기를 잡기 전까지는 절대로 나오지 않으시는 분이라고, 진심으로 학생들을 위하는 아빠의 모습 덕분에 어릴 적부터 교사를 꿈꿨었노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것이다. 무슨 문제만 생기면 마치 슈퍼맨처럼 나타나는 해결사이자 나의 이상형이기도 하셨다.
“아빠가 해결할 테니까 걱정 마.”
이 말은 아빠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나는 온 힘을 다해 이 말을 믿었다. 없는 살림에서 시작해 가정을 꾸려나가기가 쉽지 않으셨을 텐데, 툭하면 힘들다거나 그만두고 싶다거나 하루종일 침대를 뒹구는 나와는 달랐다. 평일엔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 일하셨고, 주말엔 밀린 집안 청소를 하시며 매우 부지런하게 움직이셨다. 한 번은 내가 대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하던 시절, 이사를 앞두고 갑자기 몸살이 났다. 짐을 옮기기로 예정한 전 날까지 다 싸두어야 했는데 도저히 몸을 움직일 수가 없어서 울면서 아빠께 전화를 했던 기억이 난다. 너무 아파서 짐을 쌀 수가 없다고 하소연하듯 말하자 아빠는 또 하나도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을 남기고는 다음 날 자취방에 나타나셨다. 못다 싼 짐을 싸고 무거운 짐을 번쩍번쩍 들며 이사를 순식간에 마치고 난 후 아빠는 별거 아니었지? 하며 날 보고 웃었다. 그렇게 아빠의 주말은 또 한 번 가족을 위해 사용되었다.
그런 아빠의 교직 생활이 채 1년도 남지 않았을 해였다. 아빠는 이전부터 정년 퇴임 후에 숲 해설가가 되는 것을 꿈으로 가지고 계셨다. 웬만한 과학 선생님보다 더 많은 나무를 알고 계시는 아빠였기에 우리는 그 꿈이 당연히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 해 동안 낮에는 수업을, 저녁엔 숲 해설 공부를 하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함께 수업을 듣는 사람들과 매 주말 산을 타며 풀과 나무, 새 공부도 하셨다. 해도 너무 열심히 하셔서 일 년 새에 무려 7kg이나 빠져 가족들의 걱정을 한 몸에 받기도 했다. 그래도 아빠는 그 공부가 좋다 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숲 해설 모임을 끝내고 집에서 식사하며 아빠는 오늘 ‘가장 행복했던 순간’에 대해 이야기할 일이 있었다고 말씀하셨다. 문득 궁금해졌다. 항상 바쁘게만 살았던 아빠가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일까. 그래서 물었다. 아빠는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들려오는 대답은 너무나 의외였다.
“큰 딸이 임용 합격한 순간이지. 딸이 울 때 아빠도 울컥했어.”
너무 놀라서 다시 눈물이 왈칵 날뻔했다. 애써 그게 그렇게 좋았어? 하며 넘겼다. 임용에 아쉬운 점수차로 계속 떨어지는 나에게 한 번도 모진 소리를 하지 않고 묵묵히 지원해 주던 아빠였다. 듣고 싶은 강의가 있으면 언제든 말하라고 해주셨고 단 한 번도 형편이 어려우니 강의 수를 줄여보거나 일을 다녀보는 건 어떻겠냐고 하신 적이 없었다. 나는 속된 말로 친척들조차 우리 부모님이 불쌍하다고 할 정도로 부모님 등골을 빨아먹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몇 년 동안이나 딸의 합격 순간을 행복으로 간직한 채 아빠는 살아왔던 셈이다. 이 순간은 나에게 잊지 못할 기억이자 원동력이다. 힘들 때마다 생각한다. 나는 아빠의 자랑이라고. 그러니까 이렇게 포기할 수 없다고.
결혼을 한 후에는 두세 달에 한 번 정도 부모님을 뵌다.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애매한 거리를 오가는 사이에 아빠의 나이가 훌쩍 늘어나 있음을 느낀다. 핸드폰이나 컴퓨터를 잘 다루시지 못하거나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해서 내가 오길 기다리거나, (다행히 결과가 양성이었던) 종양으로 수술을 하시거나 하는 일들이 일어날 때마다 너무나 마음이 아프고 불안하다. 여태까지 아빠가 그러셨듯, 이제는 내가 아빠의 든든한 슈퍼맨이 되어드려야 함을 느낀다.
아빠의 행복했던 순간이 우리가 함께한 또 다른 날로 바뀌길 바라며. 나는 오늘도 나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