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고 기다렸던 황금연휴가 시작되었다. 어린이는 아니지만 쉬는 날은 어린이나 어른이나 쉬는 것 자체만으로도 기쁜 날이다. 아침에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쨍하고 화창한 맑은 날이 아닌 잔뜩 흐린 하늘에 주룩주룩 빗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물론 일기예보를 통해 오늘의 날씨를 익히 알고 있었으나 혹시나 오보일 수도 있을 거라는 아주 작은 희망을 가졌는데 오전 내내 내리는 비를 보니 그 희망은 완전히 소멸하고 말았다.
우리 집에서 어린이날을 어린이답게 즐길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사람은 초등생 막내뿐. 하지만 비가 와서 지역 행사마저 연기된 마당에 빗속을 뚫고 인근 지역까지 가서 어린이날 행사에 참석할 마음은 1도 없었다. 사실 연휴라고 특별한 계획을 세웠던 것은 아니었다. 며칠 전 남편에게 어버이날도 있어서 시댁에 다녀오자는 이야기를 했었다. 꼭 그리 하자는 약속은 아니었지만 암묵적인 약속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전국적으로 하루 종일 비가 올 거란 소식에 장거리 운전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선뜻 집밖으로 나설 수 없었고 좋지 않은 날씨에 아들내외와 손주, 손녀가 오는 것을 못내 걱정하신 시부모님 덕분에 우린 출발을 하지 못했다. 그럼 집콕을 해야 하는 어린이날 연휴에 우린 무엇을 하며 지내야 할까.
연휴 전까지 중간고사를 치른 첫째, 둘째는 늦잠을 잤고 시험도 없는 막내도 덩달아 늦게 일어났다. 덕분에 늦은 아침을 미리 사다 놓은 김밥과 샌드위치, 피자로 간단히 해결한 후에 TV에서 어린이날 특별한 애니메이션이라도 하는지 채널을 돌려보던 중 둘째는 드라마 우영우에서 멈췄다. 백상예술대상 받은 기념으로 1-12회까지 풀 방송을 한단다. 우영우 드라마를 좋아하는 두 딸들은 그걸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게다가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휴일이라 드라마 몰아보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래. 오늘은 허락하겠다. 어린이날이니까. 비가 와서 마땅히 즐길거리도 없는데. 12화? 오전부터 시작했으니까 늦은 밤 되기 전까지는 끝나겠지? 이렇게 나의 머릿속에 나름 계산을 마친 후 큰 선심이라도 쓴 듯이 흔쾌히 허락했다.
오전 10시 이후부터 보기 시작한 드라마는 아이들의 온 정신을 빼앗아갔다. 거실에 드러누워 보기도 하고 점심을 먹으면서도 두 눈은 TV에 고정했다. 나도 중간중간 지나다니며 보기도 했지만 드라마 몰아보기란 쉽지 않아 보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봐야 한다는 책임감과 온몸의 에너지를 끌어다 TV에 집중해야 하는 고된 노동 같아 보였다. 물론 자신이 좋아한다면야 고됨이 아닌 기쁨이겠지만. 하루종일 내리는 빗소리와 우영우 드라마 소리로 우리 집의 하루는 그렇게 채워졌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밤 10시가 넘었다. 그런데도 아직 9회째다. 아이들은 여전히 우영우에 집중모드였고 점차 그들을 바라보는 내 맘도 힘들어져갔다. 왜 내가 이걸 허락했을까. 갑자기 후회가 밀려왔다. 아니다. 평소에 게임도 안 하고 유튜브도 안 하고 TV도 잘 보지 않는 아이들이니 오늘만큼은 끝까지 참자. 기다려보자. 비가 와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으니 보고 싶은 거라도 실컷 보게 하자. 몰래 게임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어느덧 밤 12시가 넘었다. 드라마는 아직도 11화다. 아.. 이젠 내 인내심의 한계가 왔다. 12시간 이상의 TV시청은 이제 그만 됐다. 아이들도 조금씩 힘든지 다행히 눈동자가 풀렸다.
"얘들아, 이젠 그만 자자. 도저히 12회는 못 보겠다."
"아... 좀 아쉬운데... 아직 1개 더 남았어요."
"더 이상은 안돼. 오늘 하루 종일 드라마만 봤다. 몰아보기는 여기까지 끝!"
"끝까지 보고 싶은데..."
"안돼! 시간이 몇 시인 줄 알아? 빨리 들어가. 자!"
"알겠어요."
"네..."
아쉬움이 잔뜩 묻어나는 얼굴표정으로 아이들은 각자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드디어 하루 종일 풀가동 중이던 우리 집 TV가 꺼졌다. 하루 종일 TV 보는 것도 쉽지 않네. 텔레비전 시청은 원 없이 했으니 한동안은 드라마 보자는 얘기 안 하겠지? 앞으로는 허용하지 말아야지 다짐해 본다. 이런. 쉽게 허락한 내가 잘못이지. 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