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 윤 Mar 05. 2020

가족이란 이름의 안식처

숨겨진  마음을 알아주는 유일한 사람들.  

우리 엄마는 나와 친구처럼 지내는 사이기에 다투기도 많이 다투고 둘만의 추억도 제법 많다.

집순이인 우리 모녀는 내가 한가한 날 둘이서 함께 노닥거리면서 티비를 보거나, 커피를 타서 마시곤 했다.

워낙 커피를 좋아하다 보니 나는 계절에 따라 여름엔 더치커피를, 가을엔 모카포트를, 겨울엔 캡슐커피를 이런 식으로 바꿔가면서 골고루 타서 마셨고 그래서 우리 집은 계절의 변화를 내가 타는 커피로 느낀다고 우스갯소리로 말하곤 한다.




한참 갈등을 겪고 고민이 많던 시기에도 엄마는 전혀 나의 상황을 모르고 계셨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타고난 게 '첫째'성향이라서 그런지, 부모님을 걱정시키는 말과 행동을 절대 하고 싶지 않아서 엄청나게 싸웠거나 기분이 안 좋았더라도 엄마를 만날 때면 '별일 없는 나'를 연기하곤 했다. 남들처럼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했다고, 드디어 우리 딸도 남들 같은 행복을 누리게 됐다고 기뻐하는 엄마에게 내가 조금이라도 결혼생활에 근심이 있거나 걱정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분명 걱정 많은 우리 엄마는 물어보지도 못하고 끙끙 앓으셨을 테니까.

평소엔 친구를 만난 얘기, 직장 얘기, 걱정되는 것들 같은 소소한 이야기들을 거리낌 없이 나누던 내가 결혼생활에서 생긴 걱정들은 전혀 말하지 않은 데다 내색도 하지 않았으니 엄마가 내 상황을 알 수 있을 리 만무했지만, 사람의 느낌이란 것은 참 알 수 없는 것이다. 엄마는 내가 집으로 돌아온 뒤 몇 번이고 그 얘길 하셨다.


"희한하지. 네가 일 끝나고 집에 오잖아. 나랑 한참 있다가 저녁이 되면 간다고 하면서 일어나는데, 이상하게 현관문을 나서는 네 뒷모습이 짠한 거야. 너 가고 나서 운 적도 있다니까. "


엄마의 말에 나는 웃었지만 울었다. 엄마를 속이겠다고 무척이나 애썼지만, 결국 엄마는 은연중에 '진짜 나'를 느끼고 계셨던 것 같다.


나는 결혼 후 갔던 신혼여행에서부터 크게 다퉜었다. 그래서 신행이 끝난 다음날 자고 일어나 그가 출근하는 것을 보고는, 새벽같이 친정집으로 왔더랬다. 엄마는 무척 반가워하면서도 어리둥절한 얼굴로 아침부터 웬일이냐고 하셨고 나는 그냥 웃었다. 몰라, 엄마가 보고 싶더라. 하면서. 그 후로도 하루가 멀다 하고 일을 마치고 나면 엄마가 보고 싶어 친정집으로 퇴근하곤 했다. 결혼하기 전,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며 엄마와 나란히 앉아 예능프로를 보며 수다를 떨거나, 이모가 집에 놀러 오셨을 때 같이 커피를 내어드리거나, 우리 집 강아지와 함께 산책을 하거나 했던 소소한 시간들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모른다. 그때는 그게 행복인 줄도 몰랐는데.

친정집에 온 지 한 달쯤 되었을 때 이모가 갑자기 집으로 찾아오셨다. 아마 나도 엄마도 연락이 없으니 영 걱정되고 답답하셨던 모양이다. 말도 없이 찾아온 것을 보고 놀라서 문을 열어주면서도, 막상 이모를 보니 어쩐 일인지 나도 엄마도 눈물이 터져버렸다. 이모는 왜 울어?? 하고 아무렇지 않게 집에 터벅터벅 들어오셨지만 우리는 모두 알고 있었다. 이모가 그립지만, 보고 싶지만, 어쩐지 연락하지 못했던 것을.

집에 돌아오고 나서 나는 잠도 거의 못 자고 밥도 먹지 못했었는데  엄마는 그런 나를 위해 가끔 외식을 하자거나, 오랜만에 피자를 시켜먹자거나 가족여행을 가자고 하시면서 간간히 티 나지 않게 기분 전환을 시켜주려 노력하셨다. 이날도 엄마는 이모도 온 김에 맛있는 걸 먹으러 가자며 나를 데리고 고깃집에 가셨다. 웬일로 우리 엄마가 소고기를 다 사주냐며 못 이긴 척 끌려간 내게 이모는 이것도 저것도 시키라면서 당신이 사겠다며 많이 먹으라고 하셨고 나는 그 말씀대로 열심히 고기를 먹었다.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온 뒤에는 정말 오래간만에 두 분에게 따끈한 커피를 내어드리곤  물 한 컵을 떠서 내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서둘러 가방을 뒤져 어딘가 있던 소화제를 챙겨 먹고 한숨을 돌리자, 밖에서 엄마와 이모가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들을 새라 작게 나누던 대화와 훌쩍이는 엄마의 젖은 목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모른 척, 방에서 나가지 않았다.  


아빠는 결혼 전과 똑같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 않으셨고 그저 늘 그랬듯이 퇴근하고 돌아오시면 같이 커피나 마시면서 뉴스를 보며 오늘 하루를 이야기했다. 예전에 그랬듯 가끔은 티비로 영화도 보고 치맥을 하며 마치 아무 일도 없던 예전처럼 시간을 보냈다. 나는 그것이 무척 고마웠다. 내가 괴로워한 날들에 대해 설명할 필요도 없고 해명할 필요도 없이, 그저 나를 믿어주는 아빠와 엄마 옆에서 안전하게 보호받는다는 느낌으로 내 감정만 추스르는데 온 힘을 기울이면 되는 것. 돌아올 곳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때때로 갑갑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울적한 기분에 술을 마시고 싶을 때, 엄마 아빠와 치맥을 하는 것도 한두 번이다.

혼자 있고 싶고 소리 내어 엉엉 울고 싶은 것을 참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17.4.22 am4:46
 집에 왔는데 마음이 갈 곳이 없다.

17.4.28 am1:56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혼자 조용히 있었으면 좋겠다.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잠도 못 자고 자꾸 악몽을 꾼다. 심지어 가위도 종종 눌린다.
이혼이라는 게 나한테 일어나는 일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래서 이혼하면 외국 나가는구나.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살고 싶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가족들이 걱정할까 무너지는 나를 보여주지 않으려 애쓰는 것도 힘에 부쳤다.

그럴 때면 가끔은 밖에 나가서 공원에서 혼자 맥주를 한 캔 마시거나 차에서 술을 홀짝이고 들어오곤 했다.

부모님이 속상하지 않게 혼자서 울고 돌아오면, 분명히 티가 날텐 데도 슬쩍 울었어? 하면 아니, 한마디에 자세히 캐묻지 않아 주는 것이 또 고마웠다. 돌아오고 두 달 만이던가, 도대체 마음이 정리가 안돼서 결국 혼자 여행을 떠나야 했다.


2박 3일간의 짧은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니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정말 감정을 다 내 다 버리고 올 수 있었던 건 아니지만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침착하게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 다시 용기 내서 내일을 살아보잔 생각이 들었다. 나를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으니 이제는 정말 좋아질 일만 남은 게 아닌가.                                       
https://brunch.co.kr/@seoyoon00/7 이혼 일기 2. 치유의 방법 중.


그러고 나니 한결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온전치 않은 마음의 나를 위해 가족들이 얼마나 애썼을지, 아마도 난 두고두고 미안할 것이다.




친정 집으로 돌아오고 며칠 뒤에 그가 찾아왔다. 막무가내로 집에 들어와 빌겠다는 걸 절대 들이고 싶지 않아서 그대로 있으라고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나가면서도 내심 무서웠다. 또 소리 지르면 어떡하지, 폭력적인 행동을 하지는 않겠지 하는 생각에 겁이 났지만 집에 들이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잔뜩 긴장한 채로 단호하게 내 할 말만 하고 들어와야겠단 생각을 하며 집을 나섰다.

그는 끊임없이 사과했고 변명했으며, 나는 끊임없이 흔들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우린 서로 맞지 않음을 이야기했고 행복하지 않기에 헤어지고 싶다고 설득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더 이상 시간을 끌면 안 될 것 같았다. 단호하게 마음먹고 나간 자리였지만 그의 눈물에 나는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고 마음이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이젠 안될 것 같아서 서둘러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소리치는 그를 외면하곤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잠시 후, 엄마가 다가와서 말했다.


"얘기 잘했어?"


"응...."


"OO가 내내 밖에서 너 기다렸어. 누나 걱정된다고. "


쌀쌀한 날씨의 밤이었다. 봄이지만 바람이 차가운 날이었고 나는 혼자 나가서 그와 마주해야 한다는 사실이 두려웠었다. 등 뒤에서 든든히 지켜주는 동생이 있었단 사실을 알게 된 순간에는 때늦은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 일이 있은지 몇 달 뒤, 이번에는 조금 긴 여행을 떠날 때였다. 나는 마일리지로 비행 편을 끊으려 가족 합산 마일을 쓰겠다고 했다. 그러자 동생은 저도 열심히 모았을 마일리지를 군말 없이 내어주고는, 잘 놀다 와. 조심하고. 라며 무심하게 용돈을 내밀었다. 어쩐지 그 무뚝뚝한 다정함에 눈물이 났다.      


"아무 생각 말고 재밌게 놀아. 하고 싶은 거 다하고 와. 모자라면 얘기하고. "   


남자 녀석, 무뚝뚝하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던 걸 후회했다.

그를 피해 도망쳐 나와 점퍼 하나만 입고 영하의 거리를 걷던 날 밤에 망설이고 망설이다 전화를 걸었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동생에게 나를 데리러 나와 달라고 차마 말하지 못했던 것을, 동생은 알고 있었을까.     

우리 집으로 날 찾아온 그와 집 뒤편 공원에서 두 시간 넘게 얘길 하다 들어온 그날 밤에 어느샌가 소리 없이 따라 나와 먼발치에서 제 누나를 지켜보고 있던 녀석을 나는 전혀 몰랐었다.

사실은, 무서웠는데.

고마웠어.

나는 그 말을 하지 못했다.      

어쩌면 남동생 이란 그런 게 아닐까.

아닌 척, 모른 척하면서 속으로는 신경 쓰고 에둘러 챙겨주며 혼자 마음 쓰고 있는 그런 거.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내 동생은 그런 녀석이었다.

겉으로 보이는 뚝뚝한 모습에 투덜대는 누나를 뒤에서 자신만의 방법으로 말없이 챙기고 있는 든든한 존재.    이제는 별 대화 없어도 전보다 더 동생을 듬직하게 여기게 되었다. 믿는 구석이 있다는 게 이런 것이겠지. 적어도 절벽 아래로 떨어지기 전에 손 내밀어 붙잡아 줄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이젠 안다.        

     



이전 글에서 이야기했듯이, 잦은 그와의 다툼으로 예민하게 변해버린 불안정한 내 성격으로 인해  부모님-아빠와 크게 다툰 일이 한 번 있었다. 나는 정신없이 울었고 무엇보다 그날 아빠가 보인 행동에  그의 모습이 비춰져서 그야말로 큰 충격을 받았더랬다.  (하지만 단언컨대, 아빠는 자상하고 부드러운 분이시다. 아빠에게 혼난 기억은 중2 사춘기 시절 딱 한 번 밖에 없다. 절대 폭력적인 행동이나 언행을 하지 않으시지만, 그때는... 우리 모두가 지쳐있었던 것 같다. ) 아빠는 내가 큰 소리로 대들자 화를 참지 못하셨고, 손에 들고 있던 컵을 던져 그 컵이 벽에 부딪혀 와장창 깨지는 모습을 본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불행히도 그것은 겨우 잊었던 결혼생활에서의 어떤 '사건'이 똑같이 재연되는 장면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날부터 아빠와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아니, 마주칠 수가 없었다. 본래 그런 분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아빠가 내 눈치를 살피며 연신 말을 걸려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도저히 마주할 수가 없었다. 그런 모습을 보인 아빠가 처음으로 '위협적인 남자'로 보여 무섭고 두려웠고 화해하기엔 이전에 묻어뒀던 내 상처가 너무나 컸으며 그 상처를 다른 누구도 아닌 내 아빠가 들춰냈다는 원망이 너무 컸다.


며칠째 아빠를 외면하던 나는 시간이 지나자 어찌 됐든 모든 일의 원인이 나라는 사실을 깨닫고 뒤늦게 죄송하단 메시지를 보냈다. 더불어 아빠의 어떤 행동이 내게 상처였는지도 말했다.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내가 그런 비슷한 일을 겪은 적이 있다는 걸 전혀 몰랐던 아빠는 죄인이 되어 내게 장문의 카톡을 보내오셨다. 알리고 싶지 않았던 내 결혼 생활의 단편을 알리게 되어 죄송한 마음과, 아빠를 죄인처럼 느끼게 한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아빠가 보낸 카톡의 마지막 줄을 읽던 나는 그날 밤 엉엉 울고 말았다.


부모로서 더 잘해주지 못한다는 자괴감이 항상 있어. 너희들에게 자랑스럽지 못한 아버지로서 할 말은 아니나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무게를 재거나 할 수는 없는 거야. 그저 너희들이 다치지는 않을까 항상 노심초사하며 살아왔는데 다친 너의 마음을 좀 더 헤아려 주지 못하고 소리를 내고 말았구나.
나도 지금은 삶이 거의 벼랑 끝에 서 있는 것 같다. 남자는 꼭 말로 안 해도 표현 못해도 깊은 곳의 내면은 잘 드러내지 않는단다. 우리 모두가 한발 물러서서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한 것 같다.
 나중에 너희가 부모가 되어보면 느끼는 게 있을 거야. 물론 그때는 우리가 없겠지만 자식이 어떤 자식이던지 부모는 그저 사랑하고 또 사랑할 뿐이니 그 사랑으로 너의 모든 고뇌와 번민을 감싸안으렴. 사랑한다.


부모의 사랑으로 모든 괴로움을 감싸 안기를.  내 안에서 너의 번민을 잊을 수 있기를.  

세상의 어떤 기도가 이보다 더 간절 할 수 있을까.

나는 감히 상상할 수도, 따라갈 수도 없는 사랑과 이해.

마지막 글을 읽은 순간, 아빠는 다시 내가 알던 '나의 아빠'로 돌아왔다. 곁에 있지는 않았지만 마치 아빠가 그 큰 품 으로 한가득 나를 안고 다독여주는 느낌이었다. 최고의 위로였다.




이전 06화 누구도 몰랐을 말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