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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서영 Oct 22. 2023

들어가며

나에겐 두 명의 순이가 있다. 혜순과 남순. 내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두 여자. 긴 여정이 될 이 글은  나를 둘러싼 ‘순이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스스로 풀지 않고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마음속의 매듭들을, 그리고 그 꼬인 줄을 내밀며 울고 있는 내 안에 어린 나를 30년이 넘도록 모른 척 살았다. 이제와 갑자기 그 아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겠다고 마음먹은 이유는 마음속의 매듭은 그 누구도 아닌 내면의 아이와 함께 나만  풀 수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고등학생 이후, 일기는커녕, 그 흔한 스케줄러조차 써 본 적 없이 살았던 내가 우연한 계기로 제법 긴 호흡의 글쓰기를 시작하면서 ‘나도 뭔가를 완성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자존감 외에 또 하나 얻은 것이 있었다. 영영 해결되지 않을 것 같았던 내 안의 문제들을 조금씩 풀어볼 수 있을 것 같은 나만의 방식을 찾았다는 기쁨이었다. 낚시를 한 번도 한 적 없는 초보들이 어설프게 던진 낚싯줄이 자꾸만 꼬이듯 예고 없이 내 앞에 던져진 생을 받아 들고 혼자 고군분투해보지만 자꾸 꼬이기만 하는 낚싯줄에 나는 혼자 어쩔 줄 몰라했다. 던지는 방법도 모르는 초보가 꼬인 낚싯줄을 푸는 방법을 알리 없었기에 마음속에 매듭은 오랜 세월 동안 외면되고 방치됐다. 그러다 가끔씩 들어온 누군가에 의해 무작위로 당겨지고 헤집어지기도 하면서 매듭은 점점 더 엉망진창이 되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영영 풀 수 없을 줄 알았던 매듭을 풀 수 있는 아니, 적어도 조금 느슨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건 쓰는 일이었다. 쓴다는 건 정성을 들여 들여다보는 일이다. 손에 잡힌 이 실이 어떻게 통과되고 또 어디로 이어지는지 자세히 보아야 엉킨 타래를 풀 수 있듯 꼬이고 엉켜 답답했던 과거의 실낱들을 하나하나 만지고 풀다보다 보면 언젠가 아프지 않은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희망으로 이 글을 썼다.


두 순이(혜순과 남순)의 존재는 나에게 예고도 계획도 없이 던져진 엉킨 실타래 같았다. 혜순은 내 유일한 1촌, 남순은 혜순의 시어머니이자 나의 2촌이기도 했다. 다섯 명의 가족 중에서 황 씨 성을 가진 두 명이 차례로 세상을 떠나고 나서 남겨진 세 명의 여자. 성 씨도 성격도 생김새도 모두 달랐던 우리 셋은 기름과 물처럼 한 번도 골고루 섞인 적 없이 그러나 가족이라는 명분으로 완전히 분리되지도 못한 채 살았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십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우리 셋을 그나마 연결했던 건 양 쪽의 피를 모두 가지고 있는 나였다. 피는 물보다 진하고 뜨거워서일까. 나는 남순과 혜순을 뜨겁게 사랑했고 또 그만큼 뜨겁게 미워했다.


65년 전쯤 훤칠하고 잘 생긴 병철에게 키 작고 통통했던 남순이 시집을 왔다. 점잖기로 동네에서 둘 째라면 서러울 병철이었으나 아내에게만은 무뚝뚝했고 종종 버럭 하는 일도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시간 안에서 병철과 남순은 결코 금슬 좋은 부부는 아니었다. 그러나 ‘세상은 어찌나 요지경’인지 그 둘 사이 태어난 외동아들은 아주 '기가 막혔다'는 전설(?)이 있다. 인물 좋지, 키 크지, 공부 잘해, 돈도 척척 잘 벌어, 무엇보다 부모 속 한 번 썩인 적 없는 세상 제일가는 효자이기까지 했단다. 구전으로 접한 정보라 나는 짐작과 상상만 할 뿐이지만 최측근이라 할 수 있는 혜순의 증언을 참작해 보면 전설이 아닌 기정사실로 받아들여도 무리는 없어 보였다. 그렇게 무엇 하나 빠진 것 없던 완벽한 '엄친아'는 딱 하나 ‘빠지는 게' 있었는데 그건 바로 짧은 명이었다. 33살 꽃다운 나이에 교통사고를 당해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등짐으로써 세상 최고의 효자는 가장 잔인한 불효를 저지르고 말았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남순의 세례명이, 30대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잃은 ‘마리아 막달레나’가 아닌 ‘체칠리아’ 혹은 ‘세라피나’였다면 33살의 외아들을 잃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랬다면 나도 ‘아버지 없는 아이'가 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나는 남순의 세례명이 괜히 싫었다.


한 사람은 하나의 세상이라는 말이 있다. 1987년 내 출생을 12일 남겨둔 7월의 어느 날, '부웅 - 끼익 - 쾅' 10초도 되지 않았을 짧은 순간에 일어난 일로 한 여름밤의 꿈처럼 하나의 세계가 사라졌고, 그 세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던 다른 네 개의 세계(병철, 남순, 혜순, 나)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국면을 맞이했다. 가정을 이어주는 다리 같은 존재가 사라지자 가족은 그것의 기능을 상실했다. 사랑하던 가족 구성원이 죽었다는 사실에 대한 슬픔 외에도 관계의 중심축을 담당하던 사람이 남기고 간 연결의 부재는 다른 가족 구성원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메꿀 수 없는 불편한 허무를 만들었다. 남은 자들의 몫이 되어버린 슬픔과 공허는 마치 기름을 바른 밀가루 반죽처럼 우리를 더 이상 온전한 하나로 뭉쳐지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부딪히고 치댈수록 갈라지고 겉돌았다. 우리는 각자 처음 겪는 혼란과 막막함, 그리고 설움에 갇혀 서로를 원망하고 그 서러움은 결국 스스로에게 돌아오는 괴로움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화목한 가정'이라는 진부한 단어를 세상에서 가장 어색한 표현이라고 느끼며 긴 시간을 통과했다. 예외 없이 모두가 갈팡질팡이었던 시간 속에서, 심지어 어리기까지 했던 나는 하루하루 매 순간이 인천 월미도의 디스코팡팡에서 손잡이를 놓친 기분이었다. 어디에 붙어 중심을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 조차 알지 못한 채 이리저리 치이느라 아이의 천진난만은 피어본 적 없이 시들었다.


시드는 마음을 아무렇지 않은 척 외면하는 법을 먼저 배운 아이는 자라면서 피어야 할 때를 종종 놓쳤고, 우는 법을 배우지 못한 아이는 자라서 필요 이상으로 눈물이 많은 어른이 되었다. 과거의 문제는 또 현재의 문제이기도 해서 과거를 어떤 방식으로든 해결하지 않은 채 현재를 잘 살아내거나 괜찮아진 미래를 꿈꿀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더 나은 어른이 되기 위해 아니, 삶의 매 순간을 조금 더 편하게 마주할 수 있는 내가 되기 위해 내 안의 어린 나의 이야기를 듣고, 들여다보는 일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곪은 부분을 긁어내고 환부를 소독하는 일은 아프겠지만 눈 한번 질끈 감고 견디고 나면 앞으로는 지금까지 보다 훨씬 나아지리라는 희망을 꼭 붙잡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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