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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서영 Oct 22. 2023

프롤로그 - 어린 나에게

나는 네가 여전히 내 안에 웅크리고 있다는 걸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알지 못했어. 너는 나를 떠난 적이 없고 그건 아마 나를 용서할 수 없었기 때문이겠지. 작고 슬프고 서러운 너는 어른이 된 나를 이길 수 없어서 그저 조용히 그리고 물끄러미 나를 바라봤을 거야. 네가 구석에서 웅크리고 있을 때는 나도 평범한 척 살아가지만 가끔 네가 예고도 없이 벌떡 일어나 나에게 화를 낼 때면 나는 속수무책으로 주저앉아 버리고 말아.


이를 테면 혼자 길을 걷다가,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다가, 버스를 기다리며 사람들을 구경하다가……  물론 내가 인지하는 감각들 속에 너의 울음을 촉발하는 무언가가 있겠지만 그게 너를 자극한다는 인식조차 하기 전에 나는 너에게 나를 몽땅 빼앗기는 느낌이 들어. 내 안에 들어온 너는 맺힌 한을 풀어야겠다는 듯 내 몸으로 눈물을 흘리면 나는 어느 순간 창피한 줄도 모르고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게 돼.


오늘은 새벽부터 12시간을 일하고 지친 퇴근길에 네가 고개를 들었어. 여느 때처럼 별다른 기별도 없이 불쑥. 내 동의를 구하지도 않고 네 멋대로 25년 전으로 날 데려갔어. 평소 같으면 활자를 읽거나 무의미하고 자극적인 영상을 보면서 너를 쫓아냈을 텐데 오늘은 너무 피곤한 나머지 그럴 힘도 없었거든. 결국 나는 한 시간 반 동안의 퇴근길 내내 눈물로 마스크를 흠뻑 적셔야 했고 하필 퇴근 시간의 전철 안이라 많은 사람들의 시선들까지 다 감당해야 했어. 그래도 마스크 덕분에 눈과 마스크의 거리인 3cm 정도만큼의 부끄러움만 감당하게 되어 다행이라 생각했어.


한 때는 너를 원망하며 내 안에서 쫓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어. 넌 아마 그 일로 인해 나에 대한 섭섭함이 커졌을지도 몰라. 지금보다 어렸을 때는 네 존재가 창피했고, 그때보다 나이가 들고 나서는 어린 너를 여전히 감당하지 못하는 나의 미성숙함이 창피했어. 그래서 차라리 너의 존재를 무시하고 외면했어. 너를 모른 척할 때면 나는 조금 어른스러워진 느낌이 들었고, 평균과 보통과 무난함의 영역에 언젠가는 입성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꿈을 꿨던 것 같아. 하지만 그건 머리를 땅 속에 처박고 두려운 대상을 보지 않음으로써 그 대상이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타조만큼이나 바보 같은 짓이었다는 걸 깨달았어. 


너를 달래줄 수 있는 건 아무래도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 네가 상처를 받는 상황을 미리 막거나 상처를 준 사람들에게 진심이 담긴 사과를 받아내거나 정도 일 텐데 아직도 과학자들은 인류의 더 큰 숙제를 풀어내느라 타임머신을 완성시키기에는 역부족인가 봐. (물론 타임머신이 있다고 해도 과거의 사람들에게 사과를 받아낼 수 있다는 보장은 없지만) 


나는 이제 너와 마주 앉아 온 마음을 써서 네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됐어. 너의 눈을 피하지 않을 자신도 있어. 네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은 나 밖에 없을 텐데 그리고 우리 사이의 일은 우리만이 해결할 수 있는 건데 그동안 외면해서 미안해. 그리고 우리의 대화가 끝나고 나면 우리 이제 서로의 길을 걸어갔으면 해. 헤어진다는 건 언제나 슬프지만 성숙과 평온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이별도 있으니까. 그리고 가끔 나를 찾아오더라도 너무 뜨겁거나 시리지 않고 따뜻함과 시원함 사이 어디 즈음의 온도로, 서러움과 원망이 아닌 편안함과 반가움 사이 어디 즈음의 얼굴로 만났으면 좋겠어.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렸던 네가 이제는  천진난만한 아이가 되길 바라. 정량보다 더 많은 물이 들어간 아슬아슬한 물풍선처럼 항상 위태로웠던 나는 차라리 터뜨리고 나서 이제 좀 성숙한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차분한 어른이 되고 싶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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