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황서영 Oct 22. 2023

거짓말을 배웠다

내가 최초로 거짓말을 배운 건 남순으로부터였다. 8살이 된 3월 어느 날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나는 혜순이 백화점 아동복 코너에서 큰맘 먹고 샀을 봄 재킷을 입어보고 있었다. 빨리 자라는 아이들의 옷이 대개 그렇듯 당시의 내 몸보다 2~3 단계 큰 옷이었다. 소매단을 크게 두 번 접어야 겨우 손이 보일 정도였다. 어디 가서 밉보이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강박처럼 가지고 있던 남순은 하나뿐인 손녀의 몸단장에 꽤나 공을 들였기에 항상 깔끔한 차림을 유지했지만 혜순이 종이봉투 째 남기고 간 그 봄 재킷에서는 차원이 다른 지금껏 한 번도 맡아보지 못한 고급진 냄새가 났고 나는 그걸 백화점 냄새라고 생각했다.


국민학교 교사였던 혜순은 출근을 해야 했고, 남순은 생활비를 벌어야 했기에 입학식에는 병철과 함께 가기로 되어 있었다. 병철이 화장실을 가느라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입학식에 입고 갈 봄 재킷 가슴팍에 이름표와 손수건을 달아주던 남순은 작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일렀다. 


“내일 만약 선생님이 아빠는 어디 있냐 카거든(하거든) 미국에 일하러 갔다 카거라(하거라).”


나더러 지금 거짓말을 하라고? 본관 장수, 황희 정승의 23대손이라는 자부심으로 침례교회유치원과 가톨릭유치원 통합 4년 동안 내내 말썽 한번 피운 적 없는 모범 어린이로 살아온 내게 거짓말을 하라고?  남순의 지시에 몹시 거부감이 들었으나 그의 말에 반항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상황을 모면하기로 했다.


입학식 당일 병철의 손을 잡고 줄을 서서 기다리는 동안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많은 인파 속에 젊은 엄마가 아닌 다른 사람의 손을 잡고 온 아이가 나 말고 혹시 또 있을까 싶어 찾아봤지만 별 수확은 없었다. 공감할 수 있는 입학 동기를 찾는 것을 포기하고 남순의 지시 사항에 대해 고민하기로 했다.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 행정정보 공동이용망을 통해 교육부와 행정자치부가 입학생들의 정보를 공유할 수 있어 따로 서류를 들고 가지 않아도 되는 모양이지만 90년 대는 동사무소에 가서 직접 서류를 발급받아 들고 가야 했다. 책가방 속에 들어있는 주민등록초본이나 가족증명서 빈칸에 한 두 명의 사람 정도 더 적어 넣는다고 문제 될 건 없어 보였다. 지금이라도 책가방에서 연필을 꺼내 완전범죄를 꾀할 수 있을 것인지 가늠했다. 프린트된 글씨체와 비슷하게 써넣으면 되지 않을까. 크게 어려운 일 같아 보이진 않았지만 혹시라도 의심을 품은 선생님이 지우개로 가족증명서를 문질러 보기라도 한다면? 선욱에 대해 내가 알지 못하는 추가 정보(좋아하는 색깔이나 음식, 목소리, 말투 따위)를 캐묻기라도 한다면? 심사숙고해본 결과 수많은 변수들에 대한 대비책이 전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동안 읽어온 양치기 소년을 포함한 많은 동화책들이 거짓말을 하면 언젠가 크게 혼날 거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늑대가 나타났다고 거짓말을 하던 소년의 말에 여러 번 속은 마을 사람들은 진짜 늑대가 나타났을 때 소년의 말을 믿지 않았다. 남순의 지시대로 선욱이 미국에 일하러 갔다고 했다가 거짓말인 게 들통 나 사람들이 더 이상 내 말을 믿어주지 않으면 어쩌지? 그러다 혜순의 존재도 믿어주지 않으면? 그래서 모두가 나를 고아로 여기면 어쩌지? 끝이 보이지 않게 길었던 줄은 내가 고민을 하는 동안 어느새 줄어 내 앞에 고작 열 명 정도의 아이들밖에 남지 않았다. 심장이 벌렁대고 병철의 손을 잡고 있던 손바닥에서 땀이 났다. 교실에 있어야 할 것 같은 책상과 의자를 운동장에 가져와 교사로 보이는 열댓 명의 사람들이 의자에 앉아 신입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일은 항상 예상보다 성큼 다가왔다. 결국 내 차례가 오고 말았고 극도로 긴장한 나머지 그날의 기억은 딱 그 순간까지 밖에 남아있지 않다. 내 차례가 되어 나를 맞이한 교사는 한껏 다정한 목소리로 나에게 뭔가 물어왔는데 그것이 형식적인 인사치레였는지 남순의 우려와 같은 종류의 질문이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서류를 건넨 병철이 대답 같은 걸 하긴 한 모양이었지만 그의 대답 역시 멀리서 울리는 메아리처럼 아득하게 들렸다.



그 이후에도 남순은 내가 거짓말을 잘하고 있는지 수시로 확인을 했다. 


“다른 학부형들이 늬 아부지 뭐하시노 카고 안 묻더나? 그러면 니 뭐라꼬 대답하노?”


남순에게서 그런 질문을 받으면 나는 원래도 말이 없었지만 입을 굳게 다물었다.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몰랐다.


“미국에 일하러 갔다캐라. 아빠 없다카면 깔보고 흉본다. 알겠나?”




지금 생각하면 남순이 특별히 미국을 좋아해서라기보다 적당히 멀어서 이웃들이 마주칠 일이 거의 없는 상황에 개연성을 부여하고 누구나 아는 선진국이라는 인상까지, 미국은 대충 둘러대기에 그리 나쁘지 않은 옵션이었다. 내가 미국이라는 나라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건 어쩌면 그때부터였을지도 모른다. 캐나다에 8년째 살면서 다른 이들은 옆 집 드나들 듯하는 미국 땅을 비행기 스탑오버를 위해 디트로이트 공항에서 체류했었던 1시간 40분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밟아본 적 없다. 많은 사람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미국을 나는 좀 다른 이유로 싫어하게 됐다. 



남순이 혼자 살게 되고 나서부터 두 번의 이사를 했는데 새 이웃을 만날 때마다 나는 그가 거짓말을 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럴 때마다 씹지 않고 삼킨 인절미가 식도에 걸린 것처럼 가슴이 턱턱 막혔다. 혼자 사는 노인네가 자식도 없다고 하면 더 무시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가 죽인 것도 아닌데 누군가의 죽음이 흉이 되고 흠이 된다는 게 억울했다. 슬픔이 치부가 된다는 게 화가 났다. 어린 나에게 거짓말을 시키는 대신 사실을 당당하게 말해도 된다고 어린 나에게 말해줬다면 어땠을까? 오늘 비가 오지 않는 것이 사람들의 잘못이 아니듯 우리에게서 선욱이 사라진 것도 우리의 잘못이 아니라고 그러니 거짓으로 숨길 필요도 주눅 들 필요도 없다고 말해줬다면 지금 나는 조금 더 나은 어른이 될 수 있었을까. 답이 없다는 걸 알지만 나는 어른이 되어서도 그 질문을 멈출 수 없었다.


남순은 낯선 이에게 한 번도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했던 아들을 그리워하며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선 가슴을 치며 울었지만 사람들 앞에서는 대견한 아들 얼굴을 떠올리는 행복한 표정으로 거짓말을 했다. 그렇게 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진실을 말해야 할 때마다 진실이 담은 슬픔을 감당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거짓말에 기대지 않고는 살 수 없었을 만큼 타인에게 지나치게 관심이 많은 한국 사회가 남순을 거짓말쟁이로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진실도, 그 진실을 감추는 거짓도 슬프지만 나는 이제 남순이 덜 슬픈 선택을 통해 그래서 조금이라도 덜 힘들었다면 그게 미국이든 캐나다든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싫어했던 남순의 거짓말을 나는 어른이 되어서야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전 02화 프롤로그 - 어린 나에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