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황서영 Sep 29. 2024

서쪽으로 걸었다

고치지 않는 시, 하루 시 하나029

서쪽으로 걸었다


철컹철컹 쇠찰음과

달그락 마찰음과

갱갱거리는 충돌음

오른손엔 깡통 봉지가

왼손엔 플라스틱 봉지가

어깨엔 빈병 봉지가


무게도 없는 빈 것들의 집합이

부피만 커서 손목을 불편하게 한다

하찮은 비닐봉지를 뚫고 나온 일그러진 깡통이 허벅지를 스친다

아, 이거 아프구만

아, 거참 거추장스럽구만

반도 안 찬 쓰레기통을 굳이 비우겠다며 이 사단이 났다


북쪽으로 걸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길었다

은하수를 건너는 시간을 걸어 아무도 모르는 곳에 도착했다

시큼하고 위태로운 냄새가 나는 곳


검은색 통에 깡통을

파란색 통에 플라스틱을

노란색 통에 빈 병을

성실히 들고 온 것들을 소중한 것을 담듯

버렸다

그 댓가로 오백 사십 전을 받았다

왼손에 떨어진 동전들에게서 축축하고 시큼한 냄새가 났다

'유흥'과 '시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뒤섞여

검고 파랗고 노란 통 속에서 성실히 만들어졌을 냄새였다


내가 버린 것들을 뒤로 하고

이번에는 서쪽으로 걷는다

검은색 통에 작년 여름을,

파란색 통에 올해 여름을,

노란색 통에 어제의 마음을……


진짜 분리되고 수거되고 싶었던 것들은 여전히

분리되고 수거되지 못한 채

여름방학 일기처럼 쌓여있다


가벼워진 손을 무거워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껄렁껄렁

서쪽으로 걸었다

석양을 마주 노려보며

계속

나는 계속 서쪽으로 걸었다


이전 28화 깨진 날개를 주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