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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서영 Oct 26. 2024

가끔 '부먹'도 먹습니다

참을 수 없는 혼자의 무거움, 그 8화

해산물과 육류 중에서 하나만 골라야 한다면 나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해산물을 택하는 해산물파다. 누가 부먹과 찍먹이냐고 묻는다면 자다가도 대답할 수 있다. 찍먹이다. 이렇게 취향이 확실한 편이지만 가끔 아주 가끔 해산물 대신 스테이크가 더 당길 때도 있고, 소스 양을 조절할 수 있는 찍먹 대신 소스에 흠뻑 젖은 탕수육이 먹고 싶을 때도 있다. 식성처럼 성격도 가끔 평소와 반대쪽으로 폭발할 때가 있다. MBTI 테스트 결과가 80퍼센트 이상 I형(내향인)으로 기울어져 있지만 일 년에 두 어번 정도, 미친듯한 외향성이 폭발하곤  하는데 이건 모든 내향인들의 특성이라기보다 내 특이점인 것 같다. 다른 내향인을 만나 이런 이야기를 하면 공감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던 걸 보면. ‘외향성의 폭발'은 세 가지 욕망을 통해 나타나는데, 첫째 사람들이 북적이는 장소에 가고 싶다, 둘째 사람들과 왁자지껄하게 놀고 싶다, 그 속에서 관심까지 받을 수 있으면 더욱 금상첨화다. 평소의 나라면 정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런 내 특이점을 누군가에게 말했더니 그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다. 그건 마치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의 참고 참던 식욕이 폭발하는 것과 비슷한 것이 아니냐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으나 그것과는 확실히  달랐다. 평소에 선호하는 혼자  있는 시간을 나는 결코 ‘참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에 있을 때는 나만의 연중 행사가 있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일 년에 딱 두 번이면 충족되는 갈증이니 여름 한 복판에 있는 내 생일과 전세계가 파티 분위기인 크리스마스 시즌에 한 번씩 해소시켜주면 딱 적절했다. 대학생 때는 잘 어울려 다니던 동기 친구들과 여행을 가거나 클럽을 갔는데 졸업 후 취직을 다른 곳에 하게 되면서 그것도 힘들게 됐다. 친구들과 함께 하던 것들을 혼자 하기 시작했다. 한 번도 안 가본 장소로 여행을 가거나 아주 멀리에 있는 클럽(멀면 멀수록 좋다)에 가서 경건한 마음으로 혼란과 야단법석을 충분히 경험한다. 어차피 아무도 나를 모를 것이므로 평소라면 절대 입지 않을 스타일의 옷을 입거나 정체불명의 춤을 추는 것으로 소중한 일탈에 방점을 찍는다. 외향성의 봉인이 풀린 것처럼 낯선 사람에게 먼저 말도 걸고,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마음 속 이야기도 거침없이 한다.


이건 어쩌면 질량보존의 법칙처럼 일탈보존량의 법칙 같은 걸까. 내향인인 나에게 일탈은, 외향인이 되는 경험인 것이다. 아마도 외향인들은 가끔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것을 일탈로 여길지도 모르겠다. 평소에 선호하던 방식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아보는 일탈이 주는 힘은 얼핏 일상을 깨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일상이 순탄히 작동하게 해주는 반작용의 힘 같은 것이다. 일탈의 방식은 환경과 상황에 따라 변하기도 한다. 캐나다에 온 이후로 더이상 여행을 가거나 클럽을 가지 않게 됐다. 한국에서 직장 생활을 할 때는 일 년에 겨우 한 번 주어지는 여름 휴가 (주말을 앞뒤로 붙여야 겨우 9일이 되지만 이마저도 쓸 수 있는 나는 지인들의 부러움을 샀다) 시즌이 오면 회사가 있는 곳에서 최대한 멀리 벗어나고 싶어 항공 티켓 구매 사이트를 찾아보는 것이 유일안 낙이었다. 그리고 연말연시가 되면 각종 파티와 유흥이 여기저기서 넘쳐났다. 자주 가던 강남역은 연말이 다가오면 원래도 화려하던 간판들이 한층 더 번쩍거렸고 과중한 업무와 스트레스에 지친 영혼들은 여기저기서 연말 맞이 파티를 주최하기 시작했다. 그런 한국의 환경에서는 ‘여행'과 ‘유흥'이라는 도구가 꽤 적절한 일탈이었다. 


캐나다에 오고나서는 그럴 여유도 필요도 사라졌다. 한국에서보다 높아진 물가와 줄어든 수입이 여행이라는 호사를 매년 누릴 여유를 빼앗아 간 것도 있지만 캐나다에 9년 째 살고 있는 지금도 어쩐지 매일 여행하는 기분이라 굳이 어딘가로 훌쩍 떠나고 싶은 욕구가 사라진 이유도 있다. 초기엔 마음먹고 혼자 클럽에 가보기도 했다. 하지만 일 년 중 딱 한 번 내 안에 모든 외향성을 끌어모아 벼르고 벼뤄 갔던 클럽은 너무 잔잔했고 지루했다. 물이 좋은(?) 곳을 내가 찾지 못한 것일 수도 있지만 몇 번의 실망이 쌓여가자 더이상 흥미도 열정도 생기지 않았다. 그 외에도 내가 흥미를 잃게 된 또 하나의 요소는 시골에 살게 되면서 클럽이 모여있는 밴쿠버 다운타운에서 집으로 오는 일이 너무 번거롭다는 것이었다. 사실 거리 자체는 (내가 좋아하던) 홍대역과 (내가 살았던) 수원의 거리와 별반 다르지 않지만(오히려 홍대역-수원이 5km 더 멀다) 광역 밴쿠버의 살인적인 택시비는 술맛도 춤맛도 싹 사라지게 하는 효능이 있었다. 


나는 큰 기회비용을 감내해야 하는 일탈 대신 다른 종류의 일탈을 찾기로 했다. 만족해야 하는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내 안 어딘가에는 숨어있는 E형 기질을 끌어내 줄 것, 다음 날 ‘현타(현자타임)’이 오지 않을 것, 자의든 타의든 지속 가능할 것, 지나친 기회비용을 감당하지 않아도 될 것. 그래서 찾은 건 서빙 파트타임 일이었다.  현실적이고 지속가능하며 심지어 생산적이기까지 하니 나쁘지 않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팁 문화가 있는 캐나다에서는 서버(Server)들에게 그 어떤 자질보다 상냥함과 쾌활한 태도를 우선적으로 요구한다. 영어 표현 중에 ‘버블리(Bubbly)’ 하다는 표현이 있다. 마치 탄산음료의 거품처럼 톡톡 튀는 생동감과 긍정적인 에너지, 활발한 사교성을 가진 사람의 성격을 표현하는 말인데 처음 그 단어를 들었을 때 캐나다 서버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사교성, 사회성을 끌어올리고자 시작한 서버 일이었지만 처음에는 음식 주문을 받는데 딱 필요한 말만 하고 얼굴 근육을 거의 쓰지 않았다. 지나친 웃음은 가식이고 쓸데없는 말은 손님을 불편하게 만들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어떤 대화와 표정으로 ‘버블리'한 사람이 될 수 있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무표정으로 할 말만 하는 나에게 손님들은 불친절한 서버라는 평가를 내렸고, 식당 주인들은 시원찮은 팁과 부정적인 구글리뷰를 매우 싫어했다. 내 문제를 깨닫고 나서 나는 365일 중 360일 동안 비축해온 외향성을 끌어올리는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화장실 거울이 보일 때마다 목소리 톤을 여성 평균 목소리 음정인 라(A4)까지 끌어올리려는 연습과 어색하지 않게 웃는 표정을 연습하기도 하고, 대중교통에서 시간을 보낼 때마다 ‘낯선 사람과 스몰토크를 하기 좋은 주제와 질문' 따위를 챗GPT에게 물어보기도 했다. 식당 서버를 비롯해, 마트 판매원, 카페 바리스타, 고객 기술 지원팀 등 다양한 서비스업을 경험한 지 9년 차가 되어가는 지금은 별주부전의 토끼가 간을 넣었다 뺐다 하는 것처럼 ‘버블리 퍼스널리티(Bubbly personality)’를 어렵지 않게 탈부착 할 수 있게 됐다. 현재 나는 38학점을 듣고 있는 전임 학생으로서 일주일에 16시간을 식당에서 서버로 일을 하고 있다. 오전 10시부터 4시까지 6시간의 긴 수업이 끝나면 퇴근 시간 지옥같은 교통체증을 견디며 일하는 식당으로 간다. 몸도 마음도 지쳐 다 때려치우고 침대에 눕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터덜터덜 식당에 들어서지만 가방을 벗고 앞치마를 두르는 순간, 나는 다른 사람이 된다. 목소리는 3배로 커지고 얼굴 근육을 100퍼센트 쓰며 처음 본 손님들에게 ‘How is your day going so far?’ 따위의 스몰토크도 어색함 없이 시전한다. 마치 앞치마에 마법이라도 걸린 것처럼 억지로 하는 느낌없이 진심을 다해 그렇게 된다. 검은색 앞치마만 두르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것 같은 내 모습이 이중인격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가식이라고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즐겁고 맛있는 식사였다고 말해주는 사람들의 행복한 얼굴을 보면 정말 힘이 나고 기쁘다. 팁 때문에 시작한 웃음이었지만 이젠 나의 내향성을 반대편에서 잘 받쳐줄 외향성을 생산적으로 쓸 수 있는 일탈로 여긴다. 여전히 나는 혼자가 편하고 말 수가 없는 편이고 목소리톤이 낮고 사교적이지 못하며 탕수육은 소스에 따로 찍어 먹는 게 좋다. 그래도 가끔 소스의 진한 풍미를 한껏 느낄 수 있는 ‘부먹’도 즐길 수 있는 사람이 된 건 좋은 일이라고 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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