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이름 예쁜 변명, 시절인연

참을 수 없는 혼자의 무거움, 그 18화

by 황서영

좋은 사람 사랑했었다면 헤어져도 슬픈 게 아니야.



나는 그 옛날 이 노래가 텔레비전 혹은 라디오에서 나올 때마다 정체 모를 불편함을 느꼈다. 애절한 멜로디로 2000년 대 초 대중들의 가슴을 적셨던 박효신의 히트곡 ‘좋은 사람’의 후렴구 가사다. 그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의 미묘한 감정..... 이라기보다 솔직히 이건 뭔 개소리지 싶었다. 이건 그냥 쿨 병(쿨해 보이고 싶어 쿨한 척하는 병)인가 아니면 내가 모르는 저 세상 쿨함이 실제 존재하는 건가에 대해 진심을 다해 고민까지 했을 정도로. 내 상식으로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좋은 사람일수록 헤어지게 됐을 때 더 슬픈 게 당연하지 않은가. 연인이었건 친구였건 관계의 이름에 상관없이 딱히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사람도 인연이 끊어지고 나면 괜히 씁쓸하고 허전한 기분이 드는데 어떻게 좋은 사람과의 이별이 슬픈 게 아닐 수가 있지? 게다가 슬픈 게 아니라는 박효신의 노래는 보는 내가 처절하고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 분명 그 노래는 충분히 슬펐다. 노래가 나올 때마다 매번 내 마음을 불편하게 했던 그때의 유행가는 더 이상 들리지 않지만 지금까지도 여전히 남아 만남과 이별이 반복될 때마다 내 머릿속 어딘가에서 슬프지 않다는 그 가사가 박효신의 슬픈 목소리로 자동 재생되곤 했다.



인연이란 그냥 내버려 두어도 저절로 자라는 야생초가 아니라 인내를 가지고 공과 시간을 들여야 비로소 향기로운 꽃을 피우는 한 포기 난초 같은 것이랬던가. 그렇다면 나는 인내도 공도 들일 줄 몰랐던 걸까. 그래서 내 인생에 난꽃 따위는 언감생심 사치였던 걸까. 나이가 들수록 유독 나는 ‘인연’과의 ‘인연’이 별로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짐작이었다가 가능성이었다가 확신이 되어가는 걸 느꼈다. 내 문제가 뭘까 더 자주 고민했다. 정성이 없었나? 인내가 없었나? 어렸을 땐 친구의 소중함을 몰랐고 나이가 들어서 친구의 소중함을 알게 됐으나 어떻게 해야 우정이 유지되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돌이켜 보니 나는 관심 없는 화분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고 내가 좋아한 화분에는 지나치게 많은 물을 부었다. 정성은 극단적이었고 인내는 턱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우리 인생을 괴롭게 하는 것은 대체로 무엇을 했다는 ‘동사’보다 어떻게 했다는 ‘부사’ 일지도 모른다. 야박할 수 있고 정성을 쏟을 순 있지만 ‘너무’ 야박했고, ‘지나치게’ 정성을 쏟은 이유로, 꽃의 봉우리를 꺾어버린 건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었다. 무관심으로 말라죽게 한 식물이나 지나친 수분 공급으로 뿌리를 썩게 만든 식물이 어쩌면 아름다운 난꽃을 피웠을까. 이미 말라죽고 썩어 죽은 난들은 말이 없다.



인연에 대한 실패와 그곳에서 오는 허무를 거듭 반복하며 인연과 재테크의 닮은 구석을 생각했다. 아무리 최선인 것 같아도 절대 몰빵 해서는 안되고 당장은 별 재미없어 보여도 결코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렇게 말하면 과거의 시행착오를 통해 이제는 재테크나 혹은 인간관계에 대해 고수라도 된 것 같지만 정신을 차려보면 또 몰빵의 무모함과 간과의 어리석음 사이를 이리저리 헤매는 나를 발견한다. 하필 인생에서 치명적으로 중요한 재테크와 인간관계가 비슷한 바람에 인생이 통째로 불안한 거라 생각하니 막막하고 게다가 억울하기도 하다.


아무리 고민하고 노력해 봐도 매번 예측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국면으로 끝이 나는 관계의 반복에 절망하며, '고마 막 확 때려 치아 삐까'의 마음이 주기적으로 찾아오지만 불행히도 그것 또한 허용되지 않는다. 속세에 적을 두고 사는 인간이니 별 수 있겠는가. 인간관계라는 건 내가 싫고 관두고 싶다고 해서 관계를 '때려치울 수'있는 종류의 것이 아닌데 머리 깎고 절에 들어가 굶어 죽을 때까지 기다릴 용기는 없으므로 선택 사항이 아닌 것이다.


예전에는, 저 사람은 어떻게 10년 20년 된 친구들이 저렇게 많지? 하며 부러워했는데 요즘엔 (물론 그것도 여전히 부럽지만) 지난 인연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 새로운 인연에 겁내지 않는 사람들이 부럽다.


시절인연, 모든 사물의 현상이 시기가 되어야 일어난다는 말의 불교 용어라는데 요즘은 인간관계의 유통기한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단골로 쓰이는 단어다. '인연을 이어가는 건 까탈스러운 난꽃을 피우는 일처럼 어려운 일이라잖아. 미안하지만 그런 정성과 품을 들일만큼 너는 내게 더 이상 소중하지 않아'...... 를 예쁘고 있어 보이게 이름 지은 말, 아무리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던 인연들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그렇게 느꼈다. 한 번은 유튜브에 그 문제의 예쁜 단어로 검색을 해봤더니 많은 사람들이 그 주제에 대한 영상을 올리고 또 댓글을 달며 공감하고 있었다. '시절인연'이라는 말이 담고 있는 가르침을 완벽히 이해했다 해도 섭섭했던 것이 더 이상 섭섭하지 않다거나 그립던 사람이 더 이상 그립지 않다거나 하는 해탈의 경지에 이를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래도 사람들이 올린 영상들과 댓글을 보면서, 시절마다 끝나 버리는 인연이 나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에 모종의 위로를 얻었다. 애초에 예쁜 두 단어를 곱게 이어 붙인 그런 복합명사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만 으르도 이미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겪으며 고민해 왔다는 뜻일 테니.



인연? 어우, 그 말 너무 오글거려, 생각했다. 그 두 글자를 떠올릴 때마다 눈물부터 뚝뚝 떨어뜨리는 내 촌스러운 감수성은 더 오글거렸다. 이미 끝난 인연이 떠올라 먹먹하고 지금(아직까지는) 연결되어 있는 인연의 얼굴들이 또 언젠가 끝날 거라 생각하니 허무했다. 아직 오지 않은 인연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기대도 되지만 동시에 일 편으로는 아찔하다. 먹먹과 허무와 아찔함 사이에서 느끼는 현기증과 멀미를 해소하고자 쇼펜하우어와 니체를 자주 찾으며 자위했으나 해소됐다기보다 그냥 어지러운 멀미에 익숙해지는 적응력이 늘 뿐이었다.



더 이상, 좋은 사람을 사랑했었다면 헤어져도 슬픈 게 아니라는 노래 가사가 불편하거나, 인연이라는 오글거리는 두 글자를 떠올릴 때마다 우는 청승을 부리진 않지만, 이미 지난 인연도, 현재 진행 중인 인연도, 아직 다가오지도 않은 인연도, 언젠가는 어떤 식으로든 끝이 난다는 것을 알고서 어떤 마음으로 세상을, 인생을, 사람을, 그리고 인연을, 대하고 받아들이고 또 보내야 하는지 나는 아직도 모르겠다.



"화내고 싸우며 헤어지는 거보다, '어쩌다 보니 그냥 그렇게 된' 지난 인연들이 더 슬퍼요."


언젠가 내 슬픔과 허무함을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나는 시절인연이 슬픈 게 아니라고 생각해’. ‘어째서요?’. ‘연이 닿아 함께 했던 시간 동안 최선을 다해 즐겁게 잘 지냈으면 그걸로 좋은 거니까. 영원한 건 원래 없는 거잖아’.


담담하게 말하는 그 사람의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나도 언젠가 이 사람에게 하나의 시절로 기억되겠구나. 순간 박효신의 '좋은 사람'의 후렴 가사가 오랜만에 들렸다.


좋은 사람 사랑했었다면 헤어져도 슬픈 게 아니야.

이별이 내게 준 것은 조금 멀리 떨어져 너를 헤아릴 수 있는 맘


나는 지난 인연들에게 좋은 사람이었을까? 그래서 노래 가사처럼 슬픈 이별은 아니게 되는 걸까? 아니면, 좋은 사람이 아니어서 오히려 슬픈 이별이 될 수 없었을까? 박효신 말마따나, 떠난 그들이 있어서 나는 내 문제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물론, 좋아했던 사람이 좋은 사람이었다는 이유로,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 것이 슬프지 않다는 건 여전히 동의할 수 없다.

keyword
이전 17화낭떠러지를 향하는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