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혼자의 무거움, 그 17화
붉은 산과 황금색 협곡이 푸른 하늘과 맞닿아 있는 골짜기의 절경에, 하늘보다 더 푸른 머스탱 컨버터블이 먼지를 내 내뿜으며 광휘를 더한다. 카우보이 모자를 쓴 운전석의 여자는 소리를 지르며 급 브레이크를 밟는다. 두 여자가 탄 차는 아슬아슬하게 낭떠러지 앞에 멈춰 섰다. ‘이게 시x 도대체 뭐야’, ‘나도 몰라, 그랜드 캐년 같은데’, ‘근데 졸라 아름다워’. 운전석과 조수석의 두 여자들이 눈앞의 광경에 넋을 잃고 있는데 낭떠러지에서 헬기가 떠오른다. 경찰이 탄 헬리콥터다. 그때서야 현실인지가 된 주인공들은 차를 후진해 낭떠러지에서 물러난다. 전방에는 헬기, 후방엔 십 수 대의 경찰차가 포진했다. ‘우리를 잡으러 군대를 끌고 왔어’라고 말하는 두 여자는 두렵다기보다 들떠 보인다. 수적으로 보나 상황으로 보나 잡힐게 누가 봐도 분명한데 운전석의 여자는 권총에 장전을 하며 경찰들과 맞서겠다고 한다. 그걸 옆에서 지켜보던 조수석의 여자는 친구에게 말한다. 우리 그냥 앞으로 달려가자고. 앞은 낭떠러지인데 계속 달리자고? 권총을 장전하던 그는 놀란 표정으로 친구에게 진심이냐 묻고, 조수석의 여자는 마치 프러포즈에 대답하듯 벅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Just) Hit it.”
영화 델마와 루이스의 마지막 장면이다. 어렸을 때는 내일이 없는 것처럼 본능에 행동을 내 맡기는 그들의 쿨함과, 지루한 속박보다 위험한 자유를 택한 그들의 화끈한 결정이 멋있어 보여 이 영화를 좋아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더 자주 떠올리게 됐다. 죽음에 대한 생각이 많아지면서부터다. 죽음을 떠올릴 때면 엑셀레이터를 밟는 루이스의 카우보이 부츠가 자주 떠올랐다. 산다는 게 마치 낭떠러지를 향해 돌진하는 자동차에 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태어난 모든 존재는 죽음을 향해 매 순 간 조금씩 다가가고 있다는 진리는 새로울 것도 없지만 나는 필요 이상으로 자주, 그 변하지 않을 진리를 떠올렸다. 인간에게 죽음이 있기 때문에 우리 삶이 의미를 가지는 거라는 말, 물론 나 또한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그 의미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지만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는 별개로 낭떠러지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이 때때로 견딜 수 없이 무서워 죽음이 확정된 삶이라는 건 얼마나 큰 형벌인가 생각하기도 했다.
많은 심리 관련 서적에서 나를 괴롭히는 두려운 대상의 정확히 어떤 점이 나를 힘들게 하는지 최대한 자세히 들여다보라고 했다. 내가 또 말은 잘 듣는 편이어서 시키는 대로 자세히 그리고 깊숙이 들여다보았더니 진짜 두려운 것은 모든 것이 끝나는 추락의 그 순간보다 절벽 끝을 떠나 자동차가 떠오른 순간이라는 걸 깨달았다. 브레이크를 밟거나 후진을 할 수는 없어도 엑셀레이터를 누르는 발의 압력을 조절할 수 있는 지면 위의 시간이 끝나고 마침내(?) 공중에 차가 떠오른, 삶의 모든 통제를 잃은 순간이 왔을 때 혹시 떠나온 낭떠러지를 뒤돌아 보며 후회하지는 않을까. 결국 죽음이 두려운 이유는 지금의 나로선 미리 알 수없고 그래서 통제할 수도 없는 미래의 잠재적인 후회 때문이었다.
생각해 보면 어렸을 때부터 나는 선택을 하는 것이 유독 힘들었다. 그 선택이 퇴사를 결정하거나 집을 계약하는 등의 중차대한 일일 경우에는 말할 것도 없지만 사소한 일일 수록 나의 선택 장애는 유독 빛을 발했다. 성당에서 하는 크리스마스 행사 후 본당 출구에 어린이들이 하나씩 가져갈 수 있도록 선물 꾸러미를 쌓아 두었는데 나는 그 앞에서 30분을 넘게 고민하곤 했다. 다 똑같은 내용물이 담겨있었지만 플라스틱 포장지를 묶고 있는 리본의 색깔이 네 가지나 되었기 때문이었다. 어른이 되었다고 해서 선택이 쉬워지진 않았다. 여전히 오늘 신을 양말 색깔을 고를 때, 저녁으로 먹을 메뉴를 결정할 때 크림파스타와 토마토 스파게티를 두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오랜 시간이 걸린다(실제로 얼마나 걸리는지 말해도 아무도 믿지 않을 테니 구체적으로 말하진 않겠다). 물론 이런 나라도 사회성을 포기할 수는 없기에 누군가가 여행을 다녀온 기념품으로 사 온 냉장고 자석들을 보여주며 고르라고 할 때는 최대 6초를 넘기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지나치게 사소한 일에도 결정을 잘 못하는 나를 보며 엄마는 오랫동안 말해왔다. 일단 선택하고 나면 그렇게 고민했던 것이 기억도 안 날 정도로 사실 별일 아니니 너무 고민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하는 엄마에게 나는 항상 되물었다. 만약 그게 나중에 혹시라도 별 일이 되면 어떡해? 그거 하지 말고 다른 거 할 걸 하고 땅을 치며 후회하면 어떡해? 그러면 또 엄마는 말했다. 인생에서 웬만한 선택들은 내 것이 되고 나면 더 좋아져. 그리고 만약에 나중에 가서 만일 후회하게 되더라도 뭐, 그때 가서 까짓것 땅 몇 번 후려치고 말아. 의아했다. 내 것이 되면 더 좋아지는 게 참 말일까?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는 말’는 우리나라 속담과 ‘남의 잔디가 더 푸르게 보인다(The grass is always greener on the other side)’는 서양 속담 따위들이 ‘내 것이 되면 더 못나 보인다’는 주장을 범지구적으로 하고 있는데?! 여러 세대에 걸친 다수의 경험과 교훈을 축적한 결과로써 사회적 합의와 공감이 반영된 속담을 믿어야 할지, 세상 누구보다 내가 불안하지 않길 바라는 엄마의 충고를 믿어야 할지 또 선택의 기로에 선 나는 이러다 영화 인셉션의 꿈처럼 영원히 헤어 나오지 못하는 끝없는 선택의 미로만을 헤매다 인생이 끝나버릴 것만 같아 더 이상 그만 선택하고 싶다고 느낄 때쯤 문득 깨달았다. 속담과 엄마의 말 사이에서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속담을 다시 잘 들여다봤더니 ‘보인다’고 말하고 있었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이고’, 남의 잔디가 더 푸르게 ‘보이고’...... 그러니까 그렇게 ‘느낀다’는 거다. 인간의 욕심이 그렇게 보이게 만들 뿐 실체는 다 거기서 거기라는 뜻이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이거나 남의 잔디가 더 푸르게 보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사실은 내 욕심이 문제일 뿐, 내 떡이 더 크고 내 잔디가 더 푸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재고하게 된다.
내가 어떤 일생일대의 고민을 하든(물론 대부분은 사소하고 하찮았지만) 대중목욕탕에서 잠깐 빌려 쓰고 말 세숫대야의 색깔을 고르듯 쉽게 말하는 엄마의 반응을 보며 마음속에 전구가 하나 켜지듯 깨달은 게 또 있었다. 후회에 맞설 용기도 하나의 선택지가 될 수 있다는 것.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는지에만 전전긍긍해 왔지 후회를 받아들이는 것 또한 하나의 선택지로서 존재할 수 있다는 건 생각해 보지 못했다. 1번 빨간색 양말을 신는다, 2번 초록색 양말을 신는다, 3번 3초 안에 신속하게 결정하고 나중에 혹시 후회하게 되면 그냥 후회한다. 물론 3번 선택지를 고르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그런 선택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선택의 과정이 좀 편해지는 게 있다. 이제는 모든 결정에서 3번 선택지도 함께 고려하려 노력 중이다. 요즘 들어 가장 많은 에너지와 열정을 쏟게 되는 인간관계에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와의 관계에 더 깊어질 용기를 낼지 인연의 끝을 결단할지 너무 길게 고민하는 순간에도 내가 탄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는 낭떠러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것을 상기한다.
엄마는 밥 말 리가 누군지 모를 테지만 엄마의 말이 밥 말리의 명언과 닮았다는 생각을 한다.
‘Love the life you live. Live the life you love.’
당신이 사는 삶을 사랑하고, 당신이 사랑하는 삶을 사세요.
아름다운 명언이지만 순서가 바뀌면 더 완벽해질 것 같다.
‘Live the life you love, and love the life you live.’
지금 내가 사랑한다고 믿는 삶을 선택하고, 그 이후에는 내가 한 결정의 결과물인 내 삶을 사랑해 주면 된다. 일단 내 것이 되고 나면 좀 더 사랑스럽게 느껴진다고 엄마가 그랬지 않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다 보면 때때로 후회하는 일도 생기겠지만 그건 내 삶의 부분일 뿐 삶 전체를 후회하는 것은 아니니까 괜찮다고 믿기로 했다.
얼마 전 창고에서 썩어가던 복싱 글러브를 다시 꺼냈다. 시간 날 때마다 샌드백을 열심히 때리며 단단한 주먹을 만드는 데 힘쓰고 있다. 혹시나 모를 후회의 순간을 대비해서다. 내가 사랑하는 삶을 살고, 내가 사는 삶을 사랑하다가도 가끔 후회할 때가 오면 땅을 제대로 잘 후려치기 위해서다. 그러면 다시 털고 일어나기도 분명 수월하겠지. 후회 없는 마지막이라는 건 어쩌면, 선택과 결정 그 자체보다 선택과 결정이 빚은 결과에 대한 그 이후의 마음과 태도로 만들어지는 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