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g Challenge - Day 11
저녁에 와인을 한 잔 해서 취기가 있는 관계로, 술과 나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보고자 한다.
대학교 1학년 때까지 술을 싫어했다.
어린시절부터 아버지가 술을 지나치게 많이 하시는 모습을 봐서 그런지 술에 대한 좋지 않은 인상이 강했다. 굳이 좋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생각 탓인지 당시만해도 몸에서도 술을 받지 않았다.
새내기 때 학교에 적응하지 못했던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술을 피한 것도 한 몫 했다.
엠티 가서도 혼자만 술 게임에서 빠져나와 바깥을 맴돌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관련해서는 일화가 하나 있다.
여러 시험을 통해 합격한 성균관대학교 방송부.
언론 관련 부서가 다 그런지는 모르지만 방송부도 역시 술을 세게 달리는 분위기였다.
(선배가 술잔 들면 그 아래로 원샷)
술을 버려도 보고, 원샷을 피해도 보고, 별 짓을 다해봤지만 버티기가 힘들어 술취한 연기를 했다.
평소 술을 피하던 이력이 있는지라 선배들은 의심했지만 그래도 나의 완벽한 연기?에 택시를 태워주셨다.
"어ㅏ저쎄 청랴애리로ㅠ가주에세여" 아저씨 청량리로 가주세요
선배가 택시 문을 탁!하고 닫아주는 순간까지도 잔뜩 꼬인 혀로 말했던 나는, 택시가 출발한 지 30초만에 자세를 고쳐앉고 정확한 발음으로 말했다.
"아저씨, 혜화역으로 차 돌려주세요."
아저씨는 어쩌면 내가 이중인격인 줄 알았을 것이다.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완전히 겉돌고 있었고 내 안전지대 밖으로 나와 새로운 환경에 익숙해져야 할 때였다.
결국 방송부도 탈퇴하게 된 나는 새로운 동아리인 사이프(현 인액터스)에 합격하면서부터, 이제 마음을 완전히 다르게 먹고 무조건 적응해보자고 생각했다.
그래서 첫 환영회부터 필름이 끊길만큼 주는대로 마셨다.
다음 날 함께 취한 친구들과 묘한 동지애를 느꼈고, 필름과 함께 술에 대한 저항도 끊겨버렸다.
세련되지 못했던 내가 그들의 문화에서 유일하게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술이라고 생각했기에, 새벽 2시에 불러도 나가고 3시에 불러도 나가고 그렇게 참 많이도 마셨다. 마침내는 박술녀라는 호칭까지 얻게 되었다.
술 버릇도 참 다양했다.
가장 메인은 노래부르기 -
특히 뮤지컬 노래를 정말 많이 불렀다. (아래 곡)
단골 술집의 지정무대라고 할만한 한 공간에서 하루에 네 번 이상 부른 적도 있다.
그래서 아직도 선배들을 만나면 가끔 이 노래를 불러보라는 요청을 듣기도 한다 ㅋㅋㅋ
그 외에도 노래방 가자고 하기, 자기, 노래방 가자고 조른 후 정작 노래방 가서는 자다가 다 끝나서야 깬 다음 다시 노래방 가자고 하기, 다른 테이블 사람 붙잡고 술집 배경음악에 춤추기, 말도 안되는 영어하기 (Busan Foreign Language High School은 왜이렇게 반복하는거임), 갑자기 엄마 소개하기 (우리 엄마는 김! 경례! 입니다) 집 데려다 줄려는데 안 알려주고 사람들 스파이놀이 시키기 등......
이러한 술사랑은 위젠 초반까지도 계속되어서 - 게다가 대표님도 술을 좋아했기 때문에 - 같이 일했던 세현이가 때로 장문의 문자를 보내 '대표님 이사님 평소에는 정말 다 존경하는데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로 시작하는 조언을 여러번 반복해야 하기도 했다.
그래도 그 때까지는 술이 삶에 독이 되기보다는 즐거움을 준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몇 가지 좋지 않은 변화가 일어났다.
먼저, 부정적인 술버릇이 생겼다. 울거나 우울해지고 갑자기 자리를 뜨기도 하고 말다툼을 하기도 하고 옆 사람을 괴롭히기도 하고...
또한 필름이 끊기는 경우가 점점 더 많아졌고 평소의 기억력까지 나빠졌다. 원래가 워낙 일 외의 생활에 덤벙대긴 하지만 그래도 어제 먹은 식사도 기억 안 날 정도가 되니 친구 사이에서도 별명이 알츠하이머가 되었다.
술 마신 다음 날 몸에 입는 데미지도 점점 커졌고, 회복까지 걸리는 시간도 길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결국은 어느 날 새벽, 응급실로 실려가는 지경에 이르렀다.
더 이상 술은 내 삶을 기쁘게 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나는 술에게 끌려다니고 있었고, 술은 내 삶을 나쁘게 만들었다.
응급실 사건 이후로 눈에 띄게 술을 줄여갔다.
참여해야 하는 술자리, 술자리에서 마시는 술의 양을 줄였고, 특히 필름이 끊기는 빈도를 1년에 1~2회 정도로 줄였다. (그것도 많은 거 아니냐고 하겠지만 이전에 비하면 획기적으로 줄여가는 중..)
이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이미 형성된 나의 이미지를 탈피하는 것이었다.
어느 자리에 가든 나는 이미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이었고, 내 곁에는 술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나와 만나면 달리는 술 자리가 될것이라 기대했다. 오랜만에 만난 선배들도 '너 술 잘하잖아' '변했네' 라며 이전과 같은 모습을 바라기도 했다.
그런 기대를 깨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
재미있었던 술자리가 끊임없이 인내해야 하는 괴로운 자리가 되었고, 조금이라도 절제하지 않으면 통제가 깨어질까봐 조심하는데 내 모든 에너지를 쏟아야했다. 처음 일년이 그래서 특히 괴로웠다.
하지만 뭐든 시작이 가장 어려운 법.
시간이 지나다보니 사람들도 나의 새로운 모습을 이해하기 시작했고, 주변에서도 이전처럼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나 또한 술을 지나치게 많이 마셔야 하는 자리는 피할 줄 알게 되었다. 특히 자리에서 먼저 일어서는 당장의 뻘쭘함이 장기적으로 나 자신을 위해 얼마나 더 나은 선택인지 깨달았다.
술을 많이 마시지 않아도 술자리를 즐기고,
술 없이도 관계를 쌓아가는 방법을 배우게 되었다.
+
물론 나는 여전히 술을 좋아한다.
소주는 소주 나름의 솔직한 매력, 막걸리는 막걸리만의 때묻지 않은 감성, 맥주는 맥주만의 시원함, 와인은 와인만의 우아함, 고량주는 고량주만의 강렬함, 칵테일은 칵테일만의 작품같은 느낌이 ...
각자의 맛과 향, 느낌을 가진 술의 즐거움을 아직 인생에서 지우고 싶지는 않다.
다만 술로 시야가 흐려져, 진짜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때로 취하되, 취해있지 않는 연습을 하는 지금이다.
*이 포스트는 열두달 Life Detox Challenge 중 블로그 챌린지의 일환으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