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아 moi Feb 20. 2024

무지짐으로 속풀이

들기름에 단짠하게


 어렸을 때부터 김치 중에서는 깍두기를 좋아했고, 잘 익은 알타리를 겨우내 지짐으로 먹는 것도 좋아했다. 깍두기의 아삭한 식감이, 익힌 무의 달콤함이 좋았기 때문이다. 특히 겨울이면, 무지짐이 없는 한 끼 식사는 서운할 정도였다.

 하지만 어느 때부터 우리 집에서는 무김치를 담지 않았다. 사실 매해 김장 때마다 무 자르기가 너무 힘들어 이제 무김치는 먹지 않겠다고 선언한 탓이었다. 최근까지도 큰이모께서 김장 김치를 보내주셨는데, 혹 알타리김치를 함께 보낸 겨울이면, 알타리무지짐을 먹을 생각에 기분까지 좋아졌다.


 들기름과 함께 끓여 낸 무지짐의 달큼함과 짭짤한 맛의 조화, 그리고 알맞게 익힌 무의 말랑 아삭한 식감은 겨울이면 가장 생각나는 집반찬이다. 독립 후에도 종종 이 무지짐이 생각났지만, 귀찮음에 엄마에게 만드는 법을 물어본 뒤에도 미루기만 했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없을 정도로 먹고 싶어졌다.




 마침 냉장고에는 지난번 친구가 가져다준 알타리 김치가 알맞게 익어 있었다. 인터넷에 알타리무지짐 요리법을 검색했더니,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재료들이 많이도 필요했다. 하지만 요리에 정석은 없기에 오늘은 초간단 무지짐에 도전해 본다.

 우선 알타리김치에 버무려진 양념을 물로 씻어내고, 알맞은 크기로 잘랐다. 마늘을 다지는 것이 귀찮아 얇게 썬 마늘과 들기름, 적정량의 물을 냄비에 담아 인덕션에 올린 후, 국간장과 설탕을 한 숟가락씩 넣어 맛을 더하고 무가 말랑해질 때까지 기다렸다. 고소함을 더하고 싶어, 어느 정도 끓기 시작한 무지짐에 들기름을 한 숟가락 더 추가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팔팔 끓기 시작하자 냄비 뚜껑 사이로 뿜어져 나오는 김이 온 집안을 맛있는 냄새로 채웠고, 무에 젓가락을 찔러 넣어 보니 제법 말랑해져 있다. 오랜만에 입맛이 당겼다.


 겨울 방학 늦잠을 자고 일어나 먹는 늦은 점심에는 언제나 내 입맛을 고려한 이 무지짐이 올려져 있었다. 눈을 뜰 때부터, 집안 가득 퍼진 냄새로 나는 오늘의 메뉴를 알 수 있었고, 들기름을 넣은 무지짐의 고소하면서도 단짠함이 식탁에 앉기도 전에 내 입맛을 돋웠다. 역시! 아는 맛이 무서운 법이니까.


 무지짐은 다른 음식보다도 유난히 더 생각나는 집밥이다. 포근한 집, 걱정할 것 없던 겨울 방학, 그때의 집밥이 고픈 지난 며칠이었다. 지난밤의 술 한잔 속풀이 겸, 요 며칠간 이어진 속앓이로 쓰린 속을 달래기 위해 단짠한 무지짐을 만들어 보았다. 딱 엄마표 맛이었던 무지짐에 밥 한 공기를 먹고 나니 이제야 기운이 난다.

매거진의 이전글 오랜만의 출근 풍경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