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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연결고리

내가 열쇠가 되어 줄게요.

by 김혜정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우리 집에는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명절 연휴나 제사를 지내는 날에는 스무 명 남짓 되는 친지들이 모였는데 껄껄껄 화통한 웃음 안에는 당숙들의 만담이 깔려 있었고 말하기 좋아하는 당숙들과 당숙모들, 우리 삼촌 숙모는 저마다 입씨름을 하며 목소리를 섞었는데 그게 난 너무 재밌었다. 가끔씩 초대하는 아빠의 친구 가족들은 맥주, 오징어 땅콩과 깊은 밤을 나누었고 오빠 친구들은 아무 때나 우르르 놀러 와 시끌벅적 놀다가 라면을 후루룩 먹고 갔다. 내 친구들은 조용조용 놀다가 연기처럼 사라졌다.


단연 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다닌 사람은 우리 엄마였는데 주로 오빠 친구의 엄마들이었다. 학부모회의 운영진답게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는 아줌마들이었는데 왜 그랬는지 난 늘 엄마와 아줌마들 틈에 끼어 앉아 있었다.




나보다 27살이 많은 우리 엄마의 그때 나이는 30대 후반. 엄마는 많은 사람들과 어울릴 때면 말똥 굴러가는 목소리로 자지러지게 웃었고 두툼하고 커다란 입술에 빨간 립스틱을 발랐던 민석 오빠 아줌마도 늘 목소리가 쩌렁쩌렁했다.

엄마와 아줌마들은 소설을 멋들어지게 낭독하던 전기수에 버금가게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1인극 모노드라마처럼 보여 주었고 가끔씩은 노래도 구성지게 한 가락씩 뽑아 놓았다. 그 시간 속에서 나는 삶의 희로애락을 어렴풋이나마 느끼며 어른들의 인생길을 엿보았다. 탐탁지 않은 가정사나 세상 소중한 자식들 이야기는 토도독 터지는 팝콘처럼 내 머릿속에서 강렬한 자극이 되었고 슬프고 험난한 인생사나 미래를 향한 불안감은 앞길 창창한 나에게 비수가 되어 날아들었다. 그런 내 마음엔 아랑곳없이 어른들은 만날 때마다 그들만의 거창한 리그에 빠져들었고 또한 마음껏 드러내었다. 뭔가 복잡하고 알 수 없는 오묘한 세계를.

아직 가지 않은 길이지만 어른이 되면 저렇게 복잡다단하게 살면서도 즐겁고 행복한 거구나 했다.


그런데


이후 가계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엄마의 40대 초반에는 이전에 없던 노동의 삶이 시작되었다. 젊어서는 마음의 고생, 늙어서는 육체의 고생.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인생사, 노동은 삶의 질을 급속도로 떨어뜨렸고 영원히 지속될 것 같았던 그 호기로운 시절은 바람결에 날아가 버렸다. 거울 속에서 빛나던 눈빛은 행복했던 짧은 시절을 그리워하며 눈물 먹은 눈빛으로 변해 있었다.


40대 중반이었을 때부터 엄마는 고등학생이 된 나를 친구처럼 대하기 시작했다. 밖에서 있었던 일들은 모두 다 털어놓았고 아빠와 싸워서 힘들 때에는 밤마다 하소연했다. 그런 엄마를 위로하고 보듬어 주는 것은 내 몫이었다. 밤마다 사연을 들어주고 전신을 두드려가며 몸의 피로도 풀어 주었다. 멀어진 지인들 때문에 속상해하는 마음에도 진심으로 공감했다. 엄마는 나한테 더 많이 의지했고 바빠진 오빠나 무관심한 아빠의 빈자리를 나에게 보상받았다. 하나밖에 없는 연약한 엄마를 보호했어야 했던 건 나의 책임이었고 무언의 의무였다. 그리하여 고등학교 때부터 스물여덟 살에 결혼하기 전까지 엄마의 촉수는 나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내가 아이를 낳고 힘들었을 때 50대 후반의 엄마는 일을 하지 않았으면서도 내 옆에 있어주지 않았다. 나의 일에 아무런 관심이 없어 보였다. 엄마의 생활이 편안했는지, 물리적 거리가 멀어진 만큼 심리적 거리도 멀어졌는지 잘 알 수 없었다. 나를 필요로 할 때만 찾았지 내가 정작 엄마를 필요로 했을 때는 없었다. 오래도록 친구의 자리에 있어주었건만 언제부터인지 궤도에서 벗어난 타인 같았다. 그때부터 나도 모르게 감정에 금이 갔다. 엄마에게 고통이 있어야 내 존재가 드러나는 것 같아 허무했다. 너의 사소한 고통은 엄마의 고통에 비하면 발뒤꿈치의 때 정도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것 같아 입을 닫았다. 그냥 각자의 삶을 타인처럼 살아가자고, 엄마의 친구 역할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엄마라는 존재는 어떤 것인가, 나는 엄마에게 어떤 딸이어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했고 결론도 내렸다. 인간은 모두 고독한 존재이며 앞으로 살아갈 날들 동안 고독감을 나누며 주어진 생을 함께 하는 게 최선이라고. 다만 서로에게 기대하지 말고 온전히 자기가 가진 사랑만큼만 양껏 베풀자고. 교회에도 모시고 갔고 마음 안에 사랑이 깃들길 기도했다. 하지만 엄마의 황폐한 마음을 그 무엇도 채우지 못했다.




지금의 엄마 나이는 73세. 엄마의 현재는 외롭다. 남편의 무관심은 한계가 없고 마음 깊이 남았던 친구도 오랜 공백으로 서먹한 관계가 됐다. 자식들도 먹고 사느라 아이들 키우느라 바쁘다. 작년 중반까지 일했던 그 고된 청소 자리가 오히려 그립다. 사람이 고프다. 24년 된 아파트에서 벗어나 새집 한 번 살아보고 싶다. 혼자 자유롭게 살아보고 싶다. 무엇을 바라고 살아야 하는가. 남은 인생길 죽지 못해 살아야 하는가. 나는 누구로 존재하는가. 엄마의 푸념은 늘 반복되는 레코드판처럼 돌아간다.


남은 여생이 평안했음 한다. 굴곡진 삶 누구에게 보상받으려 하지 말고 그저 오늘 하루에 감사하고 기도하며 살았음 한다. 차고 넘치는 사랑이 아니어도 찰랑찰랑 내 그릇에 족할 만큼의 사랑으로 남은 여생을 사셨음 한다.


나에겐 이제 막 크고 있는 자식들과 자상하고 친절한 남편도, 내 전화를 기다리는 친구들도, 능력껏 운영하는 일터와 아무 때고 마음을 하소연할 수 있는 글 취미도, 영원히 볼 수 있는 책과 영화도, 든든한 내 편인 하나님도 있는데 엄마한테는 단 하나가 없다. 그래서 허무하다.

혼자 하는 취미라도 하나 가졌다면 얼마나 좋을까. 신앙에 작은 씨앗이라도 뿌렸음 얼마나 좋았을까.

어려서 귀에 못 박히게 들었던 욕설과 무시 발언도 상처였고 엄마의 이기적인 사랑도 나에겐 상처였지만

70 평생 고단하게 살아온 엄마의 진정한 친구가 되어 줄 사람은 나밖에 없음을 안다. 지겹도록 들어온 레코드판이라도 들어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나에게 엄마가 필요했던 때가 있었듯이 엄마가 진정 나를 필요로 하는 건 어쩌면 지금부터일지도 모른다.


인생은 길고, 긴 인생을 함께 나눌 동지가 필요하다. 그게 누가 됐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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