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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정 Oct 04. 2023

과거로의 회귀가 즐겁다

나이가 먹었다는 증거일까.

자꾸만 과거로 회귀하는 것이 즐겁다.


내가 20대였을 때,

- 내가 20대였을 때라고 말하니까 생각나는데에~ 내가 엘레이에 있을 때에~ 하는 벅찬호가 생각난다 -

읽었던 파울로 코엘료의 《11분》이 어떤 내용이었는지와 내가 그때 이해한 내용이 작가의 의도에 맞았는지에 대 궁금증이 확 올라왔던 건 아마도 브런치에서 어떤 댓글에 《11분》을 언급했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ㅡ 문장의 호흡이 매우 긴 예 / 짧고 명료한 글이 좋은 거라고 알고 있지만 가끔은 이렇게 엿가락처럼 늘어나면서도 맛만 좋다면 긴 문장을 써도 좋다. 이 문장의 맛은 그다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요즘 책을 읽을 시간이 별로 많지 않지만 그 와중에 읽고 싶은 책은 더러 사서 읽고 있는데, 새로 출간된 책보다는 오래전에 읽었지만 다시 읽고 싶은 책이나 읽고 싶었지만 어려울 것 같아 손대지 못했던 고전 혹은 두꺼운 책을 사게 된다.


                               ㅡ 이번 문장도 또다시 길어졌다. 여기엔 이유가 있다. 내가 지금 파울로 코엘료의 《11분》을 막 읽기 시작해서 7페이지를 읽고 8페이지째 읽기를 시작했는데 그의 문체가 나를 벌써 흥분시켰기 때문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깨알 같은 글씨로 이렇게 적어놓았다. "이 책을 당신께 바칩니다. 모리스 그라블린. 저는 당신과 당신 부인, 당신의 손녀, 그리고 저 자신에게 한 가지 의무가 있습니다. 모두가 듣고 싶어하는 것만이 아니라 저를 사로잡고 있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의무 말입니다."라고 말이다. 고로 나 역시도 모두가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의 나를 사로잡아버린 감정이나 아주 사소한 생각 또는 습관에 대해서 이렇게 가감 없이 써버리는 것을 일종의 자유이자 의무라고 말해 봐도 되지 않을까. 후훗. 위대한 작가의 글을 읽는다는 건 무지 흥분을 멈출 수 없는 일이다.



《11분》 오랜만에 다시  읽어본다. 과거 오래전에 읽었는데도 읽는 순간 기억이 되살아나는 문장이 있다. 영화를 볼 때도 배우가 대사읊는 그 순간 그 대사가 기억난다. 모든 걸 기억하고 있지는 않지만 어떤 것들은 해마에 기억 흔적(memory trace) 남 있다. 신기하다. 나는 책이 재밌어서 읽는가, 기억 흔적을 발견하는 게 재밌어서 읽는.



미래를 현재에 사는 것도 즐겁지만 과거로 회귀하여 기억 흔적을 찾는 것도 즐겁다는 생각이 든다. 올 가을~ 너무 바쁘지만 미래와 과거를 동시에 살아내며 건강도 잘 지킬 수 있기를 기원한다. adios~~^^



p.s. <11분>은 남성이 오르가즘을 느끼고 사정에 이르는 데 걸리는 시간이다. 내 기억 흔적에 남은 정보에 의하면 말이다. 그러나 여성은 그러기가 쉽지 않다. 충분한 전희가 필요하고 또 관계를 갖는 남성과의 정서적 교감이 중요하다. 육체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교감할 때 여성과 남성은 모두 오르가즘에 도달할 수 있다. 이를 위해 11분은 여성에게  가혹하지 않은가? 남성들이여, 행복한 성생활과 사랑이 넘치는 부부 관계를 원한다면 고작 11분으로 와이프를 만족시키려 들지 마시라.


작중 주인공 마리아의 일생을 아직 따라가고 있는 중이다. 남성 작가가 여자 주인공의 심리와 사생활을 이렇게나 깊이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지경. 사실 어젯밤 십 몇 페이지까지 읽다 말았는데 이번 주엔 완독하고 아마 여러 상념에 빠질 예정이다. 마리아를 보며 나를 볼 것이고 그녀가 성에 입문하는 과정과 종교에로 귀의하는 과정을 볼 때 나의 삶도 돌아보게 될 것이다. 한 사람의 일생을 통해 나의 과거로 회귀하는 과정은 모처럼 사색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이것이 과거로의 회귀가 즐거운 이유라고 할까.


종교에로 귀의하는 과정이라고 하니까 생각나는데에~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이 생각난다. 《좁은 문》에서 알리사는 제롬을 그렇게 사랑하고 연모했으면서도 결국 손끝 하나도 불허하지 않았는가. 육체적 사랑은 정신적인 사에 대한 이율배반이라고 여기면서 말이다. 그에 비하면 《11분》의 마리아는 육체적 사랑을 격렬히 원하면서도 동시에 정신적 사랑까지 추구한, 어쩌면 완벽한 사랑을 원했던 여자가 아니었을까. 여기서 완벽한 사랑이라고 한 이유는 여자로서의 완벽한 사랑은 정신의 숭고함 혹은 종교적 원숙함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지만 ( 생각에) 남자들의 완벽한 사랑 육체적 사랑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고로 남녀가 모두 만족하고 충만한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는 정신적(정서적) 사랑을 기반으로 하는 육체적 사랑까지 노력하는 것이 가치롭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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