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혜정 Feb 14. 2024

1화

1화

         

무음으로 전화가 울리고 있다. 언제부터 울리고 있었을까. 받고 싶지 않은 발신자로부터.      

언제인지부터 모르겠지만 언제부턴가 정인은 핸드폰을 무음으로 변경해 놓았다. 우연히 그랬는지 일부러 그랬는지 기억은 안 난다. 하지만 벨소리를 무음으로 바꾼 것은 의도치 않게 크나큰 자유를 안겨 주었다. 받고 싶지 않은 전화는 어물쩍 넘길 수 있는 자유. 자유로의 도피. 의도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의도하게 된 가장된 우연.    

  

원래 정인은 모든 전화를 꼬박꼬박 받던 사람이었다. 누군가 자기에게 전화를 했다면 용건이 있었을 테고 그 용건은 전달되어야 할 필요가 있었을 테니까. 그녀는 언제나 남의 필요에 응대해야 한다고 믿었다. 타인을 무시하지 않기 위해, 자기를 기만하지 않기 위해.     


하지만 그 생각은 물 담긴 그릇이 엎어지듯 이미 뒤집어진 지 오래였다. 이제 정인은 받고 싶지 않은 전화는 받지 않았다. 굳이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과 말을 섞을 필요가 있을까. 시간도 구름처럼 흐르고 흘러버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 저편으로 지나가 버렸는데. 이해하기 힘든 것은 이제는 이해하지 않기로 했다.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를 버려야 한다는 건 이미 오래전에 터득한 삶의 진리다. 인생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도 없거니와 세상의 모든 사람을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이다. 정인은 그렇게 작정해 버렸다. 이해할 수 있는 사람만 이해하고 품어주기로.     


지난 12월 정인은 과로가 심해선지 면역력이 약해져선지 마스크를 안 쓰고 지하철을 타고 다녀선지 코로나에 걸렸다. 처음엔 감기와 비슷한 느낌이었지만 목이 쎄한 게 코로나 같았다. 눈치가 빠른 정인은 병원에 가서 코로나 검사를 요청했다. 의사 선생님은 코로나는 아닐 거라며 이런 증상 정도면 그냥 목감기라고 극구 검사를 말렸다. 정인은 그래도 검사를 하기 위해 온 거니까 검사를 해 달라고 고집을 부렸다. 결국 결과는 두 줄. 것 봐, 내 감각이 더 정확하지. 정인은 의사 선생님께 굳이 무어라 항변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 병원은 다시 가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발길을 돌렸다.    

  

증세가 심하지 않아 수업을 빼지 않고 줌으로 돌렸다. 그런데 목소리는 더 이상 정인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아뿔싸, 줌수업은 오로지 말로만 진행된다는 걸 미처 생각 못했다. 다음 날은 오전 11시부터 수업이 있는 토요일. 오후까지 두 타임을 하고 나니 목만 맛이 간 것이 아니라 컨디션도 최악이었다. 의사 선생님만큼이나 자기도 몸 상태를 파악하지 못하는 바보구나, 한숨이 갈라진 기관지 사이로 삑사리를 내며 새어 나왔다.


밤늦게까지 고생한 남편이 현관문 소리를 내며 들어왔다. “아빠, 왔어?” “아빠, 왔어?” 두 놈이 제각각 목소리로 아빠 왔어를 외쳤다. 정인도 침대에 누운 채 우물거렸다.

“자.. 기..., 왔... 어?”

문을 열고 들어오며 남편 동욱이 말했다.

“어, 몸 괜찮아?”

“아니, 완전 나빠졌어.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보강 처리할 걸 그랬어.”

“그랬구나. 어이구. 수업하지를 말지. 어떡하냐.”

“내일 쉬면 좀 낫겠지. 밥 차려 줄까?”

“아, 아니야. 나 배 안 고파. 아까 뭐 먹어서. 나도 그냥 씻고 잘래.”  

“그래. 그럼. 쉬어. 미안해. 코로나 안 걸리게 조심하고. 내가 마스크 잘 쓰고 잘게.”

정인은 조짐이 아주 살짝 있을 때부터 집안에서 내내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혹시나 가족한테 옮길까 봐 밥도 혼자 먹고 욕실도 따로 쓰게 하고 철저히 스스로를 격리시켰다. 그 덕분에 남편과 두 아들은 코로나에 전염되지 않았다.     

 

다음 날, 일요일이었다. 정인은 11시가 거의 다 되어 눈을 떴다. 습관처럼 오른쪽 침대로 고개를 돌려 보니 동욱의 침대는 여지없이 비어 있었다. 출근한 후였다. 정인이 강조했던, 일어나자마자 이부자리부터 정돈하기를 클리어한 채. 아주 깔끔한 것은 아니어도 이불을 매일 가지런히 정렬해 놓으니 말 참 잘 듣는 남편이다. 고맙다. 딴 건 몰라도 말 잘 듣는 남편으로는 으뜸 중에 베스트다. 엄마가 밥 먹기 전에 먼저 밥 차려 먹으라고 아들들에게 톡을 보내고 그냥 제 침대에 시체처럼 누워 있는데 전화가 왔다.      


아, 아, 하고 소리를 내 보니 목소리가 목구멍 속으로 기어 들어가면서 쇳소리가 났다. 핸드폰 수화기 버튼을 드래그하고 너머에 있는 교구 목사님께 인사를 했다. 목사님은 목소리가 많이 안 좋다면서 약을 먹고 있느냐고 했다. 약은 잘 먹고 있는데 수업했다가 증세가 심해졌다고 했더니, 용각산이랑 판피린 에프를 좀 사다가 더 먹어 보라고 한다. 아, 그래요, 목사님. 그럴게요. 하고서 전화 너머로 기도를 한 차례 받으니 에너지가 생기면서 동시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용각산은 아빠가 젊었을 때부터 늘 양복 안주머니에 갖고 다니면서 하루에도 여러 번 그 안에 든 작은 숟가락으로 한 숟가락씩 입 안에 털어 넣던 가루약인데, 천식약인 줄만 알았더니 일반인들도 먹을 수 있는 거였구나. 판피린 에프는 할아버지가 늘상 할아버지 방에다 한 박스씩 쌓아놓고서 자주 드시던 기침약인데, 나도 재채기가 나면 판피린 에프를 챙겨 먹을 나이가 된 건가 하면서 정인은 아빠와 할아버지를 나란히 떠올린다. 제 몸이 아프니까 저보다 더 훨씬 아팠던 가족들이 이렇게 줄줄이 떠오르게 될 줄 몰랐지만, 정인은 목사님과의 통화 하나로 가족들에 대한 기억이 소환되는 것과, 이렇게 약 이름만 갖고도 과거의 일과 사람들이 신통방통 연결되는 것이 사뭇 신기하고 놀라웠다.      


기운이 나서 흐뭇하고 있는데, 또 금세 전화가 왔다. 발신인은 어머니. 2년 정도 통화를 안 한 대상이었다. 왜 갑자기 전화를 하신 걸까. 받고 싶지 않지만, 정인은 목이 아프다는 핑계로 전화를 빨리 끊을 수 있을 거란 일념으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여보세효옹~.”

“네.”

“오디야아?”
 “집이에요.”

“집이여? 근디 왜 그르케 쥐구멍에 들어가는 소리마냥 작께 말혀?”

“목이 아파서요.”

“목이 아퍼? 왜?”

“코로나에 걸렸어요. 목소리가 잘 안 나와요.”

“코로나아? 어이구, 핰핰. 잘 났스. 잘 났스. 나는 시방까증 남들은 마스크 안 쓰구 댕겨도 나는 꼬옥꼭 절때루 마스크 쓰구 댕겨서 코로나 한 번두 걸린 적 없디야. 근디 너는 저번에도 걸리지 아녔어?”
 “네, 작년 봄에 걸렸었죠.”

“핰핰핰. 긍께 나는 몸조심을 보통맨치로 하는 게 아니라 아주 그냥 마스크두 두 개씩 차고 댕겨서 그런지 몰라두 남들 두 번 세 번 걸린다는디 난 여직까징 한 번두 안 걸렸다닝께.”

“네.” (네, 잘 하셨어요.)

“근디, 난 니가 시방 코로나 걸린 지도 몰랐스. 어즈께 김장을 쪼매 해가지구 그거 갖구 가라고 할라구 전화했드니만 코로나 걸린지도 몰랐징. 동욱이는 바쁘닝께 갖구 가라고 하기가 그럴, 그럴 거 같으서 니가 시간 되믄 가질러 오라구 할라구 했드만.”

“제가 가지러 가기가 힘들 것 같아요.”

“아휴! 그르엄. 니가 오믄 안 되지! 안 돼야~! 코로나 걸려갖구 오믄 안 돼야~. 코로나 그거는 무서운 거싱께.

“네, 그럼 나중에 애들 아빠보고 가지러 오라고 하셔요. 저 지금 병원에 가 봐야 해서.”     


폭우처럼 쏟아지는 어머니의 총알 세례를 받으면서 정인은 갑자기 생각이 났다. 아, 병원에 가서 약을 센 걸로 바꿔 와야겠구나. 안 그래도 그 명백하지 않았던 진료 후에 받은 약은 이미 효력이 없는 셈이니 다른 병원으로 가서 진료도 다시 받고 약도 새로 처방받아야 했다. 어머니와의 마뜩잖은 통화 중에 얻은 아이디어 치고 아주 요긴하고 중대한 생각이었다. 어머니는 더 많은 이야기를 박 터트리듯 터트리기 시작할 태세였으나 정인은 병원 문이 닫히기 전에 얼른 나가야 한다며 통화를 황급히 종료했다. 전화를 받은 게 잘 한 건지, 잘못 한 건지 아직은 알 수 없는 채로 정인은 그렇게 일요일에 유일하게 진료하는 동네 병원으로 서둘러 갔다. 근데 코로나 걸려서 목소리도 안 나온다는 며느리한테 굳이 그렇게 당신이 여태 코로나에 한 번도 안 걸렸고, 앞으로도 걸릴 일이 없다는 걸 자랑해야 하며, 2년 만에 걸린 전화 통화에 아무렇지도 않게, 어제오늘 통화하는 사이처럼 그렇게 쯧쯧쯧, 잘 났어, 정말~ 같은 친근한 말투를 사용했어야 할까? 정인은 생각할수록 치가 떨리고 소름이 끼쳤다. 머릿속에서 지워버리려 고개를 좌우로 마구 흔들었다. 지루한 대기 시간이 1시간이나 지나가고 이번 선생님께는 아주 센 약으로 받아 가지고서 집으로 왔다. 따뜻한 진료를 받고 나니, 한겨울인데도 쨍한 날씨만큼 기분도 상쾌해졌다.      


집에 와서 약을 먹고 앉았는데 또 전화가 걸려오고 있었다. 발신자는 어머니였다.


이전 01화 프롤로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