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오카다 다카시는 그의 책에서 현대 일본 사회에서는 많은 현대인들이 회피적인 성향을 띠는데 이는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고 말했다. <나는 왜 혼자가 좋을까?>라는 책은 타인과 관계를 맺지 않고 스스로 고립되어 살아가고자 하는 소위 '회피형 인간'의 성격적 특징을 기술한 책이었다. 정인도 이제는 사람들하고 부대끼며 살기보다는 '차라리 혼자 살아가겠어요!'를 외치고 싶은 현대인이 갓 되었기 때문에 이 책을 집어든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어떤 문제가 생겨도 그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회피하는 유형은 아니었다. 문제를 회피하는 스타일은 남편이었다. 동욱은 그간 살아온 바에 의하면 어떤 문제를 정면돌파해 본 경험이 거의 없었다. 어머니한테 무슨 일이 생겨도 자기 일이 아니라는 듯 신경 쓰지 않았는데, 어쩌면 그 이유는 신경도 쓰기 전에 아주버님이 죄다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일 수 있었다. 순서가 동욱에게 돌아오기도 전에 이미 문제가 끝나 있거나 아니면 미해결 상태로 흐지부지되어 끈이 풀려 있었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포대 자루처럼 그렇게 널부러져 있었다.
정인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렸을 때부터 어떤 문제를 도맡아 해결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문제에 직면하면 해결해 볼 생각도 못하는 게 아닐까? 밥도 해 본 사람이 금방 할 수 있고, 글도 써 본 사람이 순삭 지어낼 수 있듯이, 갈등 관계가 생겼을 때 이전에 갈등이라는 걸 풀어봤어야 풀지 않겠는가 하고. 그러니까 반장도 하던 애들이 계속하는 거고, 경제권도 가져 본 사람이 돈 관리를 할 수 있지 않나. 그러니까 그동안은 아들을 키우는 일에도 속수무책이었던 남편 동욱에게 책임을 지어주기가 힘들었지만, 정국이 초4 때부터 양육에 참여할 것을 종용했을 때 그것을 기회 삼아 양육이라는 타래를 손에 쥐어보지 않았겠나. 모든 일이 그렇듯, 부딪혀 봐야 그 부딪힌 대상이 어떤 속성을 가진 것인지를 알 수 있는 것인데, 동욱은 양육에는 발을 디뎠지만, 본가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는 아직 발을 디뎌본 경험이 없는 것이었다. 정인의 눈에는 그저 무책임하고 무신경한 것으로 보였지만, 그건 경험이 없었기 때문일 수 있었다. 본인이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거나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치부했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책엔 이런 내용이 있었다. 회피형 인간이라는 것은 회피형 애착장애로 분류할 수가 있는 것인데, 그건 어렸을 적에 주 양육자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한 데서 기인한 것이라고. 주 양육자는 어머니. 정인은 어머니에게 한이 된 속박된 시집살이 스토리를 떠올려 보았다. 어머니는 농사를 짓는 집안으로 시집을 갔고 하루종일 눈칫밥을 먹으며 살았다. 어머니의 시어머니는 밥을 주려고 하지 않았다. 심사가 배배 꼬여 있었다. 어머니가 밥을 먹으려고 하면 밥상을 치운다거나 먹지 못하게 눈치를 주었다. 너무 배가 고팠던 어머니는 시어머니가 밥상을 물리면 그제야 부뚜막에 앉아 도둑고양이처럼 밥을 먹었다. 그것도 온갖 눈치를 다 보며 허겁지겁. 눈물이 날 겨를도 없었다. 신세한탄을 할 새도 없었다. 그저 밥을 입에 처넣어서라도 곯은 배를 채워야 했다. 그래야 밭에 나가 풀이라도 뽑을 수 있는 힘이 생겼으니까. 정인은 어머니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14년 전쯤, 정국이가 두 살쯤 되었을 때 어머니와 통화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정국이는 지금 뭘 하고 있냐고 물었다. 정인은 대답했다. "정국이요? 엄청 놀더니 피곤한지 지금 곯아떨어졌어요." 어머니는 대번에 지적을 했다.
"곯아떨어졌다는 말은 쓰지두 말어라. 안 좋은 말잉께. 무신 그런 말을 써. 곯아가 무어시여. 그거슨 안 좋은 말이여."
정인은 어머니의 갑작스런 단어 지적에 흠칫 놀랐지만, "아, 네~" 하고 조심스럽게 대꾸를 했었다. 속으로는 '아니, 그 말이 표준어가 아닌 것도 아닌데, 왜 쓰면 안 되는 거야? 난 어렸을 때부터 아무렇지도 않게 썼던 말인데.' 했지만, 어머니한테 그걸 따박따박 따질 순 없는 노릇이었다. 정인은 웃어른에게는 대들지도 말고 순종하는 것이라고 배웠으니까. 하지만, 지금 생각을 다시 해 보면, 어머니가 14년 전에 '곯아떨어지다'라는 단어를 그토록 정색하며 싫어했던 이유는 당신이 과거에 너무 배를 곯렸기 때문인 것이었다. 배를 곯던 그 시절, 십수 년 간의 시집살이 동안 인간 대접을 받지 못했던 자신의 처지를 떠올리는 단어여서 그런 게 아니었을까 싶었다.
아무튼 평생의 한이 맺혀 있는 시집살이 속에서 아니, 아버님이랑 잠을 같이 자 본 기억이 손꾸락을 셀 정도였는디 어떻게 아이를 셋씩이나 낳았능가 모르겠다는 어머니에게, 셋째로 태어난 아들을 돌볼 시간이 과연 있었을까? 누가 이걸 퀴즈로 낸다면 정답은 무엇일까?
"NOPE!!"
딩동댕~이다!!
어머니에겐 밥솥에 붙은 밥풀떼기를 하나라도 더 뜯어먹을 시간이 필요했다. 아그들을 하나를 낳고 둘을 낳고 셋을 낳는 동안 어머니의 창자는 지독한 허기를 품고 있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정서적 허기? 그런 건 애시당초 입에도 붙일 수 없는 '사치'스러운 것이었다. 지금이야 물질적, 경제적인 것보다 정서적인 결핍, 정서적인 문제가 더 중요한 화두인 세상이지만, 어머니가 젊었던 그 시절에 정서적인 문제는 눈코 뜨고 살피거나 어루만져 줄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묵묵히 참아야만 하는, 끝끝내 발바닥에 감추어야만 하는 아픔이었다. 친정어머니의 보살핌도 받지 못한 어머니에게는 본인의 아픔을 끌어안을 만큼의 정서적 자원이 있을 수 없었다. 그러니 자연히 동욱은 어머니의 보살핌을 못 받을 수밖에. 정인은 상상해 본다.
아가였던 동욱이 엄마한테 젖을 달라고 보챈다. 엄마는 안 나오는 젖이지만, 동욱의 입안에 젖을 물려 본다. 밥풀을 많이 뜯어먹지 못한 엄마의 젖줄은 금방 끊기고 만다. 동욱이 쪽쪽 빨아도 소용없는 젖을 향해 아앙~하고 울어재낀다. 방도가 없는 엄마는 우는 아이를 들처업고 논일을 하러 나간다. 어린 아가 동욱은 주린 배를 채우지 못한 채 엄마의 등뒤에서 잠이 든다. 다음 날이다. 아가 동욱은 놀고 싶다. 엄마를 울음으로 부른다. 엄마는 동욱의 울음이 반갑지 않다. 엄마는 늘 우울하고 힘이 없다. 엄마는 동욱의 울음에 반응하지 않는다. 다음 날도 다음 날도 그렇게 반복된다. 우리는 언어로 된 것만을 기억하지 않는다. 언어가 아닌, 몸의 감각이 과거를 기억한다. 동욱은 어렸을 적 엄마가 자신의 요구에 반응하지 않고, 거절했던 것을 몸으로 기억하고 있다. 끊임없이 거절당했던 것도 몸이 기억하고 있다. 그랬기 때문에 어른이 된 동욱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지 못한다. 끊임없이 자신을 거절했던 엄마라는 세계가 확장된 형태로 무의식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인과 관계를 맺는 것을 피하고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자기 자신에게 머물러 있는 것이 가장 안전한 기지임을 경험적으로, 감각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실은 두려움이다. 관계에 대한 두려움, 세상에 대한 두려움, 거절당할 것에 대한 두려움.
정인은 그 책을 북카페에서 읽고 와서 동욱에게 한 번 읽어보지 않겠느냐고 권했다. 동욱은 웬일인지 그러겠다고 했다. 정인은 중고책으로 즉시 주문을 했고, 동욱은 그 책을 이틀 만에 읽어냈다. 정인이 물었다. 어땠어? 그 책? 어~ 뭐. 괜찮았어. 그렇게 대화는 단답으로 끝나 버렸다. 하지만 정인은 궁금했다. 자기가 볼 때는 정말 동욱의 이야긴데 본인도 정말 그렇다고 인정할까? 동욱은 말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며칠이 더 지났다. 정인은 밤산책을 할 때 한 번 더 얘기를 꺼냈다. 그리고 동욱은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