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나의 유년 시절의 그림자
내가 엄마의 보호자가 되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나는 엄마의 기분이 흔들릴 때마다 함께 흔들렸다.
엄마의 불안과 분노가 높아가면, 나는 살얼음 위를 걷듯 조심스레 움직였다. 엄마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지기만 해도 나는 잽싸게 내 하루를 되감아 보고는
‘내가 뭘 잘못했지?엄마가 뭣 때문에 화가 났나.’ 하고 생각했다.
엄마가 불편한 기색을 보일라치면 방 정리를 깔끔하게 해놓고, 엄마가 시키기 전에 내 할 일을 알아서 했다. 엄마가 누워 팔로 이마를 가린 채 말이 없을 때면, 나는 주방으로 달려가 오렌지 주스를 따라서 엄마 앞에 놓아 두고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엄마, 이거 마시면 괜찮아질 거야. 먹어 봐.”
엄마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주스를 들이켰다.
할아버지가 집에 계신 날엔 엄마의 숨소리가 거칠었기 때문에, 나는 ‘엄마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아이’가 되기 위해 머릿속 계산기를 쉴 틈 없이 돌렸다.
엄마는 서서히 밝아졌고 다시 웃기 시작했다.
그 시절 신이 내 기도를 들어준 건지 모르겠다. (열 살 이후 성당에 발길을 끊었으니, 신이 들었다면 참 대단한 인내력이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 오빠는 5학년이었다. 오빠는 학교의 인기쟁이였고, 성적은 늘 올백. 선생님들은 엄마를 학교에 불러놓고 “아이고, 이 집 아들은 서울대는 따 놓은 당상이죠!”라고 말했다. 엄마는 그 말에 날개가 돋았고, 학교 임원직을 맡아 바쁘게 돌아다니며 기쁨을 어쩌지 못했다.
엄마가 외출할 때마다 나는 마음이 조금씩 허전해졌다. 하지만 엄마는 나의 구멍난 가슴을 알아보지 못했다.
어느 날은 엄마가 또 학교에 가려고 옷을 차려 입고 서두르는 몸짓으로 또각 구두를 신고 있었다. 나는 엄마가 어디를 가는지 번연히 알면서도 엄마의 옷자락을 잡고 늘어졌다.
"엄마, 나도 같이 가면 안 돼?"
"니가 어딜 가~! 꼼짝 말고 집이나 보고 있어."
엄마의 목소리는 야멸차고 차가웠다.
"나도 같이 데려가. 조용히 있을게~~."
나는 한번 더 간청했다. 이쁘게 말하면 엄마가 들어주지 않을까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돌아온 건,
믿을 수 없는 뺨 따귀였다.
엄마는 붙잡는 나를 떼어놓기 위한 방책으로 따귀를 내려 갈겼다. 나는 참을 수 없는 슬픔을 느꼈다. 버려짐이란 게 이런 거구나. 나는 쓰잘데기 없는 사람이구나. 엄마가 날 이렇게도 냉정하게 걷어찰 수 있다니. 믿기지 않았다.
언제 뺨따귀를 내질렀느냐는 듯 엄마가 바쁜 걸음으로 현관문을 나간 뒤, 나는 안방으로 달려가 베개에 얼굴을 박고 울었다. 참을 수 없는 눈물이었다.
그날 저녁 엄마는 집에 돌아와 콩나물 대가리를 따고 버섯을 찢으라고 그릇을 내 앞에 들이밀었다. 낮에 그을린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나는 다시 식모가 되는 기분을 느꼈다. 오싱처럼, 내가 간밤에 읽은 소설의 주인공 오싱처럼, 나는 어느새 식모 오싱이 되었다. 나는 아무 말없이 안방에 쪼그려 앉아 그것들을 깨끗이 정리했다.
“아니, 이거 하나도 제대로 못 해? 이까짓 거 하나도?”
엄마는 콩나물 꼬리가 깨끗이 정리되지 않았다며 큰 소리로 나를 몰아붙였다. 그 소리에 나는 더 작아졌다.
학교에서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친구들과 뭘 했는지는 엄마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엄마의 시선은 언제나 오빠의 성적, 오빠의 밝은 장래, 오빠를 칭찬하는 선생님들을 향해 있었다.
가끔은 나도 그 자리에 끼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오빠처럼은 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나만의 생존법을 택했다.
엄마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아이
엄마가 시키면 바로 움직이는 아이
눈치 빠르고, 조용하고,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아이
그게 내가 맘 편히 맡을 수 있는 자리였다.
그러나 모든 것은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았다.
학교에서의 나는 달랐다.
선생님들은 시험이 끝날 때마다 내게 친구들 시험지를 채점해 오라고 맡겼고, 반장이 아닌데도 교무실 심부름을 나에게 시켰다. 그건 내게 이런 말과 같았다.
‘너는 믿을 만한 아이란다.’
엄마에게서 받지 못했던 인정을, 학교라는 작은 사회에서 채워주고 있었다. 햇볕처럼 따뜻하게 내 마음을 데워주고 있었다. 지금 돌아보면 그 인정은 순전히 ‘책임감’이라는 내 안의 성질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집에서 생존을 위해 갈고닦았던 책임감. 그것이 학교에서 신뢰감으로 빛난 게 아니었을까.
나는 책임감이 커질수록 오히려 책임감을 잘 나누지 못하는 사람으로 자랐다.
누군가 기대하면 더 잘하려 애쓰고,
누군가 부탁하면 어깨를 더 내어주며,
누군가 무너질까 봐 대신 어깨를 받쳐주는 사람.
책임감은 나의 갑옷이자 내 사슬이 되었다.
엄마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엄마는 나에게 점점 더 많은 일을 요구했고, 나는 말없이 받아들였다. 엄마의 화살촉 같은 말들이 종종 날아왔지만, 나는 그 화살을 집어삼키는 법을 먼저 배웠다.
그리고 어느 순간 문득 깨달았다. 엄마가 전화만 받으면 목소리가 한 톤 높아진다는 사실을. 소리 높여 화내던 사람이 전화기 너머의 상대에게 순식간에 상냥해지는 그 장면은 너무도 낯설고 이상했다. 엄마가 ‘두 얼굴의 사나이’라며 아빠를 흉볼 때, 나는 엄마에게도 두 개의 얼굴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 사실을 말할 수 없었던 아이는,
그저 더 조용히, 더 책임감 있게, 더 튼튼한 갑옷을 입은 채 자랐다.
엄마 곁에서 무너지지 않기 위해
나는 너무 일찍 어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