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나의 유년시절의 그림자
그곳에서는 어떻게 지냈는지, 엄마의 지금 마음은 어떠할지 그런 건 알 수 없었다. 다만 나에겐 엄마가 옆에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엄마는 꺽꺽거리며 큰 소리를 내며 울었고 나를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다.
커다란 창문으로 쏟아지는 햇볕이 수족관이 있는 거실 끝 벽까지 들어왔다. 햇살이 쨍한 어느 날이었다. 수족관 안에서 유영하는 잉어와 붕어들은 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그때의 내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졌다가 간신히 바느질로 봉합되고 있는 중이었다. 열 살의 나는 더 이상은 엄마가 집을 떠나지 않기를 두 손 모아 빌었고 그런 일이 다시는 생기지 않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가혹하게도 엄마는 집을 또 나갔고 나는 할아버지와 같이 엄마를 찾아 헤매었다. 그런 일이 몇 번 있었는지는 기억에서 잊혀졌다. 대신, 잊혀진 기억은 내가 모르는 사이에 불안으로 둔갑하여 내 마음 한구석에 또아리를 틀었다.
나는 집에서 인형놀이를 하면서 혼자 놀다가도 갑자기 엄마가 있나 없나를 확인했고 엄마의 존재를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
안방 자개장롱 맨 왼쪽 칸에는 오로지 엄마의 물건만 가득 들어 있었는데, 그 속에 있는 엄마 물건을 하나하나 꺼내면서 구경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어선지 엄마의 겨울 옷가지들이 빼곡하게 걸려 있고 색색의 목도리들, 반짝이는 브로치들이 서랍 위쪽에 전시되어 있었다. 내 눈엔 까만색 여우털 목도리가 들어왔다. 여우털 목도리는 보드랍고 따뜻했다. 나도 어른이 되면 내 목도리 말고 이렇게 고급스러운 여우털 목도리를 해야지 하고 생각하면서 목도리를 목에 두르고 거울에 비춰보고 현관문 앞 신발장으로 가서 엄마의 또각 구두를 신었다. 또각또각 구두굽 소리는 구두를 신을 때마다 어른이 된 느낌을 주었다. 한참을 놀다가 다시 안방으로 들어가 이번엔 장롱 속 더 깊은 곳까지 손을 뻗었다. 안쪽에서 봉지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어! 뭐지?"
까만 봉지 안에 박카스 같은 게 여러 개 들어 있었다. 그런데 박카스라고 쓰여 있지는 않았다.
'엄마는 무슨 음료수를 혼자 마시려고 장롱 안에다 숨겨 놨데~. 나도 좀 먹어봐야지.'
나는 엄마한테 허락을 맡으려고 부엌에 있는 엄마를 불렀다.
"엄마, 장롱에 뭐 있는데 나 먹어도 돼?"
"머?!!!"
엄마가 막 뛰어 왔다. 엄마는 화가 나서 씩씩거리며 서 있었다.
"왜 그래, 엄마?"
"너 이게 뭔 줄 알고 그래!"
"몰라. 음료수 아니야?"
"뭐?니미 씨부럴"
".......?"
"엄마가 뒤질려고 사다 논 거야. 이 집구석에서 살기 심들어서어어!! 어억-어억- 칵 죽으려고 그런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하며 엄마는 악을 쓰고 울고 불고 했다. 나는 갑자기 큰 죄를 저지른 죄인이 되었다. 엄마의 아픈 마음을 건드린 죄.
"엄마, 미안해!! 엉엉. 내가 잘못했어. 안 그럴게. 어엉. 엄마! 죽지 마아아!!"
엄마는 내 말을 듣는지 안 듣는지 계속 오열을 했다. 그리고 그 음료수를 먹어 버리겠다고 했다. 나는 음료수 봉지를 뺏어 들고 밖으로 뛰쳐나가 앞집으로 갔다. 앞집 향선이네 대문을 박차고 들어가서 아줌마를 불렀다. 향선이 아줌마는 부엌에 있었다. 울먹이는 다급한 내 목소리에 놀라 아줌마가 목소리를 높였다. "왜 그래! 왜!"
나는 엄마가 죽으려고 한다고, 빨리 집에 가서 엄마를 살려 달라고 했다. 아줌마는 얼른 행주로 손을 닦고 버선발로 뛰어 우리 집 2층을 단숨에 올라갔다. 그러고서 엄마를 붙잡고 "그러면 안 되지. 00 엄마, 그러면 못 써. 애들 보고라도 살아야지. 이게 무슨 짓이야." 이같은 말을 반복했다. 엄마는 숨 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울었고 나는 옆에 앉아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1부. 나의 유년시절의 그림자
엄마의 장롱 약 사건이 처음으로 다시금 떠오른 게 언제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떠올랐던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다. 하지만 아주 분명하게 떠올랐던 순간은 기억한다. 그건 내가 *집단 상담 참여자로 상담의 과정에 참여했을 때였다. 각 집단 상담의 형식과 주제가 상이했음에도 나의 과거에서 끌어 올려진 장면은 바로 이거였다. 나는 어린 아이로 돌아가 엄마의 죽음을 말리느라 온몸이 쭈그러들었다.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고 몸이 굳는 느낌이었다. 힘없는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앞집 아줌마를 불러오는 것 뿐이었다. 엄마는 악을 썼고 나는 그 자리에 돌처럼 굳었다. 엄마의 인생을 이해할 리 없는 어린 나에게 엄마의 존재는 세상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거였으므로, 엄마가 죽게끔 놔두는 것은 내 인생을 버리는 것과 같은 거였다. 엄마가 죽도록 내버려 두지 않기 위해, 엄마를 보살펴야만 한다는 생각은 내가 고작 열 살 때 시작되었다.
*집단 상담이란
수퍼바이저님의 리드 하에 8~10명 내외의 집단 구성원들이 상호작용을 통해 개인의 문제를 해결하고 성장과 성숙, 행동의 변화를 이루는 전문적 상담 과정을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