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나의 유년 시절의 그림자
그런 일이 있은 이후로 엄마와 아빠의 언성은 방문 틈 사이를 비집고 더 자주 빠져나왔다. 듣고 싶어서 듣는 것도 아니었고, 듣기 싫다고 피해 갈 수도 없는 소음이었다. 여자의 높은 목소리가 할퀴듯 공기를 가르면, 중저음의 남자 목소리도 곧 윽박지르는 결로 바뀌어 두 소리는 허공에서 엉켜 버렸다. 할 수만 있다면 그 목소리들을 빈 자루에 꽁꽁 싸매 창밖으로 내던지고 싶었다. 밤이 되면 또다시 두 목소리가 육탄전을 벌일 것만 같아, 아빠가 집에 들어오는 시간마다 내 몸은 바짝 쪼그라들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나는 현관 옆에 딸린 아주 작은 방을 쓰게 됐다. 아빠가 퇴근해 들어오면 얼른 나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재빨리 주방으로 들어가 아빠의 밥상을 차렸다. 엄마는 안방 바닥에 모로 누운 채였다. 아빠가 오든 말든 모르는 척 냉대했고, 아빠 역시 그런 엄마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어릴 적 같은 안방에서 네 식구가 함께 숨 쉬며 살던 시절의 포근함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아빠 품에 안겨 바짝 구운 오징어와 쥐포를 찾으며 깔깔거리던 때가 그리웠다. 이제 집안에서는 더 이상 따뜻한 공기가 돌지 않았다. 오래된 마룻바닥처럼, 집 안의 모든 것이 갈라지고 차가워지고 있었다.
차가운 밤공기가 스며들면 나는 세 평 남짓한 코딱지만 한 방에서 전등을 끄고 스탠드만 켜 둔 채 숨을 죽였다. 밤은 적막했고, 내 마음은 기댈 곳을 잃고 허공에 매달려 있었다. 부모의 마음이 이미 싸움으로 굳어 버렸을 때, 아이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엄마의 눈치를 보며 슬슬 기는 일, 아빠가 오면 밥을 차려 드리는 일, 그 정도가 전부였다.
아침이 밝으면 태양빛에 잠시 새 힘을 얻어 버스로 사십 분 거리의 중학교로 향했지만, 학교에 도착하면 그 힘은 금세 바닥나 버렸다. 버스를 타고 다니는 동안에도, 도서관 책상에 엎드려 잠을 청하는 동안에도, 집에 돌아와 멍하니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동안에도 나는 혈기를 느끼지 못했다. 무기력했다. 지금처럼 불끈불끈 솟아오르는 희망이나 불굴의 의지 같은 것은 그 시절의 나에게는 없었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엄마는 바빠졌다. 집에만 있는 게 갑갑해서였는지, 아니면 경제적으로 쪼들려서였는지 —아마 둘 다였을 것이다 — 엄마는 리빙스타라는 공장에 다니기 시작했다. 엄마는 한층 활기를 띠었지만, 집에만 오면 앓는 소리가 늘어났다. 일이 얼마나 힘든지 아느냐고, 몸 구석구석 안 쑤시는 데가 없다고, 그러면 집안일은 누가 하느냐고, 집안이 이게 무슨 꼴이냐고. ‘아프다, 아프다’로 시작하는 이 소리는 라디오를 켜면 흘러나오는 음악처럼, 엄마의 귀가와 동시에 자동으로 재생되는 레퍼토리가 되었다.
엄마가 바빠지면서 나는 집안일에 대한 의무감을 떠안게 됐다. 그러나 내가 해 봤자 얼마나 하겠는가. 집을 어지르는 사람도 많지 않았고, 그 시절엔 빗자루와 쓰레받기로 청소를 했으니 먼지가 여기서 저기로 옮겨 다니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청소를 해도, 설거지를 해도 깔끔한 엄마의 성에는 차지 않았다. 나는 최선을 다했지만 엄마의 불만은 쌓여만 갔고, 그런 잔소리는 내가 성인이 된 이후까지도 끈질기게 이어졌다. 이상하게도 엄마는 그런 말을 오빠에게는 하지 않았다. (오빠가 있는 자리에서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늘 의무감과 죄책감을 동시에 짊어진 채, 엄마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잘했다, 우리 딸”같은 말은 한마디도 들어본 적 없었지만.
대신 엄마는 내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을 말들을 더 세게 쏟아냈다.
“니까짓 게 그러면 그렇지.”
“내가 너한테 뭘 기대하겠냐.”
“너는 그것밖에 못 해?”
“뭐 하나를 시키면 제대로 하는 게 없어.”
“내가 앓느니 죽지.” “남편 복 없으면 자식 복도 없다더니.”
등 뒤에서 날아오는 화살들에 맞아 기가 죽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나는 더 깊이 고개를 숙였다.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한 채, 내가 부족하다고 스스로를 탓했다. 조금만 더 잘하면, 더 노력하면 언젠가는 인정받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오빠는 공부로 척척 인정받으니, 나는 다른 무언가로라도 인정받는 자식이 되자고 다짐했다.
그렇게 나는 인정 욕구를 부풀려 가기 시작했다.
엄마의 잔소리는 멈추지 않았고, 나는 이른바 ‘착한 아이 콤플렉스’를 발동시키며 살아가기 시작했다.
상담심리 공부를 하면서 나는 알게 되었다.
엄마의 잔소리는 단지 나를 향한 잔소리가 아니었다.
그건 엄마의 ‘존재의 표시’였다.
내가 여기 이렇게 살아 있는 걸 알아봐 달라는 표시.
이렇게 고군분투 애쓰고 있다는 걸 알아봐 달라는 표시.
내가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만큼,
엄마 역시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엄마에게, 엄마는 아빠에게.
엄마는 아빠라는 존재에게서 인정받고 싶고 사랑도 받고 싶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매일 벽에 부딪히고 넘어졌다. 그런 엄마에게 아빠는 안식처가 돼 주지 못했다. 아빠에게는 들어줄 귀도, 받아 줄 여유도 없었다. 그저 하루하루 먹고사는 일만 해결하면 족할 하루살이 같은 삶이었을 뿐.
엄마는 허공에 떠 허우적거렸고,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사람은 오직 ‘어린 나’뿐이었다.
아빠가 조금만 더 이해의 폭이 넓었더라면, 조금만 더 따뜻한 환경에서 자랐더라면, 더 큰 사랑의 그릇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 어쩌면 우리 가족은 조금 달라질 수 있었을까.
사랑의 기억이 상처의 흔적보다 더 많았다면, 어쩌면 나는 이 글을 쓰지 않고도 살았을지 모른다. 내가 덜 예민했더라면, 욕심이 조금만 덜했더라면.
예민한 딸의 예민함을 눈치채지 못한 엄마는 고3이 되어 극도로 예민해진 딸에게도 잔소리를 멈추지 않았고, 엄마의 잔소리가 견딜 수 없을 만큼 지긋지긋해졌을 무렵, 고3 딸은 어느 날, 결국 엄마를 발작시키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