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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아리다 Dec 20. 2023

끝과 시작 & 충분하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모차르트처럼 잘 다듬어진 구조에
베토벤의 음악처럼 냉철한 사유 속에서
뜨겁게 폭발하는 그 무엇을 겸비했다.
_스웨덴 한림원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시선집 <끝과 시작>과 유고집 <충분하다>

‘모차르트의 구조와 베토벤의 웅장함을 동시에 닮은 시어들’ (feat.프란츠 카프카)



비스와바 쉼보르스카는 '언어의 연금술사'라 불리며 모차르트와 베토벤에 빗댄 찬사를 받는다. 1991년 독일의 괴테 문학상, 199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시'라고 하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낭만이나 서정적인 정서와는 거리가 멀다. 단어를 선택하고 배치함에 있어서 적재적소를 찾는 탁월함, 그러면서도 관조적인 자세를 유지하며, 현학적이지 않다.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시의 상식에서 벗어나 있다는 말이다. 이토록 한 마디로 정의하기 힘든 이유는 시인이 다루는 소재와 주제들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처럼 예외적인 면이 많기 때문이다. 



시인은 너와 나, 사물과 미물 모두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전제를 깔고, 인간이 언어로 명명하기 전의 사물과 현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해 언어로 변환한다. 그러나 언어란 가장 인간 중심적인 관점에서 사용하는 것인지라 인간의 규칙과 기준을 배제하면서 언어를 사용한다는 이 모순된 상황을 이 시어들 안에서 연출한다. 흔히 흐른다고 생각하는 시간 조차도 유영하는 느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시인이 시어에서 관습과 개념을 해체하는 것이 마치 미술에서 '개념 미술'과도 유사해 보인다. 이러한 새로운 시도는 언어를 안이 아닌 바깥으로 끊임없이 밀어내기에 낯설고 이절적이지만, 동시에 이지적(理智的)이다. 



<개념미술과 관련한 마이클 크레이그 마틴 포스팅>



시인들은 언제 어디서나 할 일이 많은 것 같습니다.
_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노벨상 수상 소감 중



생각해 보면, 쉼보르스카의 시를 읽는 독자 역시 할 일이 많다. 어떤 글은 단어들이 나뒹굴어 정리하기에 바쁘고, 어떤 글은 그림처럼 대비와 색채가 떠다니며 어떤 글은 SF처럼 공상과 몽상을 반복하게 한다. 



그런 와중에 날카롭게 비켜가는 시선이 틈새를 정확히 조준하고 있어 화들짝 놀라기도 하는데, 시가 아닌 다른 무엇을 보고 있는 것 같아 혼란스러운 경우도 있다. 



아무리 꿋꿋한 고정관념도 버텨낼 재간이 없다. 나의 사고에 균열이 생긴다. 변화가 생긴다. 시를 읽고 있으나, 프란츠 카프카가 말하는 '도끼'같다. 뻔하고, 그럴싸한 세상의 이치에 새로운 자극이 필요할 때 들춰보면, 어느 새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

 


다만, 시나브로 한두 편씩 읽는 것이 좋다. 한꺼번에 읽으려다 '물'이라는 시에 나오는 구절 "모든 모음을 한꺼번에 발음하며 모든 언어로 동시에 불러야만"하는 묘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으므로.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시선집 <끝과 시작> 그리고 유고집 <충분하다>는 독서(讀書)가 아닌, 생각을 읽는 독사(讀思)가 아닌가 한다. 






찾아 보니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시집을 꺼낼 때마다 나는 간단히 기록을 남기곤 했다. 



놀라운 관찰력을 발견했다. 물질에 관하여, 생명체에 관하여 일상에 관하여, 가능성에 관하여 어렵지 않지만, 가볍지 않고 간결하지만, 내용이 풍성하다.

다만, 반은 그녀의 글이고 반은 육필원고에 대한 설명이라는 점. 유고시집이어서 그랬겠지만… 아니 나는 디저트를 먼저 먹었나 보다.

<끝과 시작>이라는 책을 찾아읽어봐야겠다.
2016. 6. 26 기록


라고 생각하고 3개월 후 <끝과 시작>을 손아귀에 넣고서 이렇게 기록을 남긴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작가는 유고집 <충분하다>로 먼저 접했다. 창문은 닫힌 듯 열어 놓고 딱딱하지만 포근한 의자에 앉아 편안하면서도 똑 부러지게 종이같은 가슴에 대고 글자를 흘려 쓰듯 꾹꾹 눌러 쓴 시들을 만났다.

<충분하다>로도 충분하지 않아서 결국 나는 <끝과 시작>으로 다시 시작했다.
2016. 9. 29 기록


그 후 2018년에 나는 또 다시 이 시집을 꺼내들고 기록을 남긴다.



유고 시집 <충분하다>로 뒤늦게 접했던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시인이 선택한 단어들이 한 땀 한 땀 정성스럽게 수놓아진 자리를 가만히 들여다 본다. 처음 맞닥뜨렸을 때의 당혹감은 <끝과 시작>으로 다듬어지고 익숙해지면 쉼보르스카에 빠져들기에 충분해진다.

다시 읽는 시들은 들숨도 날숨도 새롭기 마련이다. 시간이 다르고 공간이 다르며, 그래서 공기가 다르다. 좋은 의미로든 그렇지 않든 이전의 내가 아니기도 하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시선에 포착된’ 서평인 <읽거나 말거나>도 기대된다.
2018. 11. 23 기록


이렇게 3년에 걸쳐 꺼내든 시집. 아무래도 내가 이 시인에게 당시 진심이었던 모양이다. 물론 다시 껴내든 지금도 여전히.


충분해_콜드 & 정유미 & APRO





시 전체를 옮겨야 큰 그림으로 이해가 되지만, 부분 부분만 옮겨서 기록해 본다. 




<발췌>



목록이 기재된 목록
시에 관한 시
단어를 명확히 설명하기 위해 쓰이는 단어
뇌를 연구하는데 사용되는 뇌
시선에 포착된 시선

‘상호성’ 중에서


가장 좋은 경우는
나의 시야, 네가 꼼꼼히 읽히고,
논평되고, 기억되는 것이란다.
그 다음으로 좋은 경우는
그냥 읽히는 것이지.

‘나의 시에게’ 중에서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연습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훈련없이 죽는다.

‘두 번은 없다’ 중에서


솟구치는 말들을 한마디로 표현하고 싶었다.
있는 그대로의 생생함으로.
사전에서 훔쳐 일상적인 단어를 골랐다.
열심히 고민하고, 따져보고, 헤아려보지만
그 어느 것도 적절치 못하다.

가장 용감한 단어는 여전히 비겁하고,
가장 천박한 단어는 너무나 거룩하다.
가장 잔인한 단어는 지극히 자비롭고,
가장 적대적인 단어는 퍽이나 온건하다.

‘단어를 찾아서’ 중에서


시선이 닿는 저 너머까지
이곳을 송두리째 지배하는 건 찰나의 순간.
지속되기를 모두가 그토록 염원했던
지상의 무수한 시간 중 하나

‘순간’ 중에서


물이여, 한 순간의 덧없는 네 이름을 부르기에 
내 구강 구조는 부족하기 짝이 없구나.

모든 모음을 한꺼번에 발음하며
모든 언어로 동시에 불러야만 하기에.

또한 이름을 부여받을 때까지 미처 기다리지 못한 
호수를 위해서는 단호하게 침묵해야 하기에.

‘물’ 중에서


내가 “미래”라는 낱말을 입에 올리는 순간,
그 단어의 첫째 음절은 이미 과거를 향해 출발한다.
내가 “고요”라는 단어를 발음하는 순간,
나는 이미 정적을 깨고 있다.
내가 “아무것도”라고 말하는 순간,
나는 이미 무언가를 창조하게 된다.
결코 무(無)에 귀속될 수 없는
실재하는 그 무엇인가를

‘가장 이상한 세 단어’ 중에서


겉과 속이 항상 일치하는 존재.
성공적인 피조물이다. 
한 꺼풀, 또 한 꺼풀 벗길 때마다 
좀더 작아진 똑같은 얼굴이 나타날 뿐, 
세번째로 양파, 네번째로 양파,
차례차례 허물을 벗어도 일관성은 유지된다. 
중심을 향해 전개되는 구심성의 아름다운 푸가.
메아리는 화성 안에서 절묘하게 포개어졌다.(…)
양파가 가진 저 완전무결한 우둔함과 무지함은
우리에겐 결코 허락되지 않았다. 


(…) 모든 잘못은 이성이나 논리에 있다고 
단언하지 않는 편을 더 좋아한다. 
예외적인 것들을 더 좋아한다. 
(…) 여기에 열거하지 않은 많은 것들을
마찬가지로 여기에 열거하지 않은 다른 많은 것들보다 더 좋아한다. 
숫자의 대열에 합류하지 않은
자유로운 제로(0)를 더 좋아한다. (…)
얼마나 남았는지, 언제인지 물어보지 않는 것을 더 좋아한다. 
존재, 그 자체가 당위성을 지니고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에 주목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선택의 가능성,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끝과 시작> 중에서


우연이여, 너를 필연이라 명명한 데 대해 사과하노라
필연이여, 혹시라도 내가 뭔가를 혼동했다면, 사과하노라.
행운이여, 내가 그대를 당연한 권리처럼 받아들여도, 너무 노여워 말라.(…)
미안하구나, 위대한 질문이여, 초라한 답변에 대해.
진실이여, 나를 주의 깊게 주목하지는 마라.
위엄이여, 내게 관대한 아량을 베풀어 달라.
존재의 비밀이여, 네 옷자락에서 빠져나온 실밥을 잡아 뜯은 걸 이해해 달라.
영혼이여, 내 안에 자주 깃들지 못한다고 나를 질타하지 마라.
모든 사물들이, 용서하라. 내가 동시에 모든 곳에 존재할 수 없음으로.
모든 사람들이여, 용서하라, 내가 각각의 모든 남자와 모든 여자가 될 수 없음을.
내가 살아 있는 한, 그 무엇도 나를 정당화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느니.
왜냐하면 내가 갈 길을 나 스스로 가로막고 서 있기에.
언어여, 제발 내 의도를 나쁘게 말하지 말아다오,
한껏 심각하고 난해한 단어들을 빌려와서는 
가볍게 보이려고 안간힘을 써가며 열심히 짜 맞추고 있는 나를.

작은 별 아래서 중에서,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끝과 시작>


(…)
너는 살아남았지, 맨 처음이었기 때문에.
너는 살아남았지, 제일 마지막이었기 때문에.
혼자였기 때문에, 사람들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왼쪽으로 갔기 때문에, 오른쪽으로 갔기 때문에.
비가 왔기 때문에, 그늘이 드리웠기 때문에.
날씨가 화창했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왜냐하면,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의 경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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