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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승리? 아니 진짜 승리!

과거 뒤집기

by 여서

다른 사람들은 가장 빛날 시기라고 했지만, 나에겐 가장 힘든 시절이 있었다. 20대의 나는 갈피를 못 잡고, 사정없이 흔들렸다. 왜 이런 일이 나한테만 일어나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했다. 간절했지만 이루어지지 않았던 소망. 끝이 보이지 않는 미래. 아침에 눈뜨고 일어나기조차 싫었던 일상.

누군가 도와줬으면 했는데, 도와줄 사람이 없었다. 내가 말해도, 이 내용에 대해 특별한 해답을 주지 못할 것 같았다. 징징대는 것처럼 들릴까 겁도 났다. 자신들의 삶도 벅찬데 어떻게 나까지 더 보탤까,라는 생각에 꺼내기도 무서웠다. 지푸라기라도 심는 심정으로 도서관을 찾았다. 묘하게 날 안정시키는 책 냄새와 더불어 우연히 현인(賢人)의 지혜라도 얻을 수 있을까 해서.


한숨으로 더듬더듬 책 제목을 훑어가던 때, 내 시선을 멈추게 한 제목이 있었다.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류시화 시인의 책이었다.

입으로 한 번 읊조려보았다.

좋 은 지 나 쁜 지 누 가 아 는 가.

꼭 나를 위해 준비된 말처럼 느껴졌다.
제목만으로 위로가 되어 마음을 울렸다.


출판사 더숲


시인의 말을 한자로 쓰면 '전화위복(轉禍爲福)'일 것이다.

"야, 그냥 액땜한 거라 생각해, 전화위복이 될 거야."
평상시에도 위로나 조언으로 제법 많이 쓰이는 이 말은,

사실 남들이 하면 잘 들리지 않는 종류의 사자성어다.

정말 꼬였을 때는, 남 일이라고 가볍하게 던지는 말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날, 직접 나한테 읽어주자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신 듯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러네. 이 상황이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알겠어. 혹시 이게 언젠가는 도움이 될지도 몰라."

나는 중얼거렸다.

스스로에게 했던 그 말이 나에게 효과가 있었던 것은 아마 내가 나에게 하는 '진짜 위로'였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나 너무 힘들 때는 아무것도 안 들린다. 위로한답시고 하는 저 말에 '네가 뭘 알아?'라며 반감이 들 때도 있다. 내 상황이 아니라 모를걸, 이라며 튕겨내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 말을 되새기는 순간 달라진다.
나는 정말로. 진.심.이.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보다 잘 되고 싶고, 정말 전화위복이었으면 좋겠는 사람이다. 그래서 지금 겪고 있는 이 버거운 일들이, 결국엔 피가 되고 살이 되길 간절히 바란다. 지금 이 버팀이 무용(無用)이 아니길 빌며 이 하루를 또 버텨내는 것이다.




나중에 보면, 그것이 실제인 경우가 꽤 많았다.


예를 들면, 집주인이 전셋값을 크게 올려 우울했는데 어쩌다보니 엄두도 못냈던, 마음에 드는 집을 저점에 사게 됐다. 유럽에서 비행기가 항공기 결함으로 멈췄는데, 그 경유지가 최고의 여행기억을 남기게 해주었다.

당시에는 좋은지 나쁜지 몰랐는데, 좋은 거였다.


그래서,
내가 유독 힘들어하는 지인들에게 추천하는 루틴이 있다.
바로 과거 뒤집어보기다.

아침에 나는 꼭 한 문장을 노트에 적는다.
"과거에 나는 ~했지만 ~를 통해 ~하게 됐다"

처음에는 어색하지만,
매일하다보면 저절로 사고가 달라진다.
어느 순간, 그래 이게 살이 되고 피가 될 거야 하며 스스로를 다독이고 있다.
어딜 가건, 누굴 만나건
예전엔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인다.

나의 과거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미래로 나아갈 줄 알게 된다.


마지막으로 한 나무를 이야기하며 마무리하고 싶다.
매화 품종 중 “Tortuous Dragon”이라 불리는 용유매가 있다. ‘tortuous’는 ‘구불구불하다'는 뜻으로, 복잡하고 고통스러운 길을 지나온 느낌을 준다. 그래서 용처럼 뒤틀린 ,고난을 이겨낸 존재로 비유한다고 한다.


에버랜드에서 찍은 용유매. 가지들이 고통을 이겨낸 듯 구불구불하다.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용유매 같은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혹은 지금, 그 길을 지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꼭 기억해주었으면 한다. 단단한 생명은, 가장 추운 계절에 피어난다는 것을.


헤밍웨이의 말처럼, 고통은 지나가고 흔적은 나를 더 깊게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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