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총대를 잘 맨다.
어릴 적부터 친구들을 괴롭히는 아이들에게 내가 대신 따져주는 것이 일이었다.
사주 기운상 거센 화(火)로 태어난 덕분인지,
내가 생각한 정의가 아니면 일단 순응(?) 하지 않는 편이다.
얼마 전 우연히 찾아본 나의 초등학교 1학년 학생기록부에도 '정의롭다'라고 적혀 있었다. 그 당시 추천 학과(?)가 정치외교학과로 쓰여 있었는지도 몰랐다. 12여 년 후, 실제로 나는 정외과를 선택해 아주 만족스럽게 학교를 다녔다.
다만 이런 성격은 호불호가 강하고, '아닌 건 아닌 것'이라는 기준이 너무 강하다는 단점이 있다.
불이 타다 못해 나까지 태우기도 한다.
지난 한 달간에도 회사 직원에게 불합리한 일이 있었고, 나는 또 그 직원을 위해 열렬히 싸웠다. 내가 녹아질 때까지.
내가 팀장이었으므로, 했던 일이었다.
팀원 대신 나서주는 일이 리더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결국 직원은 허탈한 방식으로 퇴사했고, 육아도 집안일도 제쳐두고 그 일에 집중했던 나는
처음으로 '갑상선기능저하증' 진단을 받았다.
최근 본 드라마 '은 중과 상연'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PD로 일하던 류은중은 '뜨지 못한' 감독 주동향을 믿고 4년 동안 시나리오를 다듬고 기획을 함께 한다.
막판에 회사는 그를 배제하고, 다른 감독과 프로듀서를 끼워 넣자
은중은 윗선과 싸우고 사직서까지 던지며 감독을 보호하려 애쓴다. 그의 진정성을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후, 은 중의 노력은 결국 소용이 없게 된다. 주 감독이 자신의 손을 놓고 시나리오와 기획 자료를 넘겨 버렸기 때문이다. 돈 때문에. 믿을 수 없었던 은중은 직접 찾아가 듣기까진 믿지 않겠다고, 끝까지 주 감독을 신뢰하지만 만남 후 오히려 "너희가 더 심하지 않았었냐"는 말까지 들으며 무너진다.
주 감독처럼,
순한 얼굴의 그는 결국 자신의 잇속만 챙기고 떠났고
나는 번아웃이 온 채 남았다.
이틀 간의 피 같은 병가도 함께.
하지만, 이 글은 내가 한 행동을 후회하며 한탄하고자 쓰는 글이 아니다.
그 일은 다시 돌아가도 했을 만큼 옳은 일이었고,
그런 나 자신이 부끄럽지도 않다.
다만 나를 회복하기 위한 작업을 다시, 또, 시작했다고 얘기하고 싶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도,
나 자신을 격려하는 문장들을 스스로를 위해 쓰는 것.
이것이 나의 회복탄력성의 비법이다.
그래도 나는 잘했다, 로 시작하는 말들을 적어보자.
그래도 나는 노력했다. 잘했다.
그래도 나는 용기 있었다. 잘했다.
그래도 나는 아이에게 부끄럽지 않은 행동을 했다. 잘했다.
더 구체적으로 적을수록 마음이 채워지는 것을 느낄 것이다.
어른이 되면 아무도 해주지 않는 격려,
그것을 나에게 '힘들 때마다' 해주자.
매일매일 나를 세우는 루틴으로 매우 적합하다는 것을 어느새 느끼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