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영화를 보면 강도들이 은행을 터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은행은 주변에 아무도 없는 황량한 언덕에 홀로 서있다. 강도가 총구를 머리에 들이대면 안경을 쓰고 팔토시를 한 은행원이 가방에 현금을 담아 준다. 강도는 유유히 말을 타고 언덕 너머로 사라지고 손발이 묶인 직원은 금고 안에서 낑낑대고 있다.
내가 사는 곳은 시골이지만 은행이 참 많다. 자본주의의 종주국 미국이 아니겠나. 시스템은 최첨단인지 모르겠지만 외양은 서부영화에 나오는 아직 그런 모습이 많다. 어디든 차로 이동하는 미국 시골에서는 흔한 풍경이다.
뱅킹 시스템이야 미국이 훨씬 먼저 발달했다고 하지만 그리 소비자 친화적이지는 않다. 비대면 계좌 개설이 가능하고, 어느 계좌에 넣어도 적든 많든 이자가 나오고, 서로 송금이 자유로운 게 여기서는 당연하지 않다.
하지만 내가 은행을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시키는 대로 계좌를 개설하고, 카드를 만들고, 그나마 쉽게 송금하는 요령을 배우고, 주식 투자도 성공했다. 각 과정은 지난하고 짜증스러웠다. 그래도 한 가지 배운 게 있다. 여기서 뭐든 급하게 생각하면 제 명에 못 죽는다. 미국에서는 시간을 가지고 멈추지 말고 계속 뭔가를 진행을 하면 된다. 그러면 결국 된다. 언젠가는 된다. 되는 것도 없는 나라지만, 안 되는 것도 없는 나라다.
문제는 집을 새로 렌트하면서 벌어졌다. 집주인은 월세를 세입자포털 사이트를 통해서 달라고 했다. 이 동네에서 집주인들이 세입자를 관리하는 프로그램인 모양이었다. 그냥 계좌 이체하면 될 걸 이건 또 뭐 하는 짓인가. 갑이 원하면 을은 따라야 한다.
세입자포털에 들어가 보니 크레디트 카드나 데빗 카드로도 월세를 지불할 수 있었다. 하지만 수수료가 2.5%에 달했다. 내 월세가 무려 4천 달러니까 수수료가 백 달러, 10만 원이 넘는다. 도둑놈들. 대신에 은행 계좌를 등록하면 수수료가 없다. 옳거니. 은행 인증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한국 같으면 계좌 이체로 1분이면 끝이다. 여기는 다르다. 집주인이 세입자포털을 통해 월세를 요구하고, 세입자가 등록된 계좌로 은행에 페이먼트를 요구한다. 그럼 오륙 일 후에 실제 지불이 이뤄진다. 과거 수표로 이뤄지던 오프라인 지불 관행이 지금도 유지되고 있는 셈이다. 한숨이 나오지만 어쩌겠나. 시키는 대로 해야지.
지불 단추를 누르고 이틀 뒤 이메일이 왔다. Payment Failure. 뭐지? 계좌에 잔액도 충분한데 왜? 집주인에게 문제가 있다고 이메일을 보냈다. 은행 인증이 제대로 안 됐을 수도 있다고 다시 해보란다. 그래 다시 해주지. 인증을 다시 하고 보냈다.
이틀 뒤 다시 이메일이 왔다. Payment Failure. 장난해? 집주인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집주인은 은행에서 지급을 거절할 수도 있으니 은행에 가서 지급을 승인해 달라고 말해 놓으란다. 아니 그럴 거면 왜 은행 인증이라는 절차를 밟는 거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다.
다음날 인터넷으로 예약까지 하고 은행을 방문했다. 은행 직원은 너무너무 친절했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까 대뜸 Obba라고 소리친다. 한국 드라마를 많이 봐서 한국어 단어 몇 개를 안다고 했다. 알았으니까 문제를 해결하자고. 은행 직원은 자기들이 지급을 거절한 적이 없다고 했다. 세입자포털에 문의를 하란다. 이것들이 정말.
세입자포털에 이메일을 보냈다. 예상대로 자기들은 책임이 없으니 은행에 문의하라고 한다. 이건 뭐지? 기자 생활할 때 민감한 내용을 취재하면 자주 겪던 핑퐁이다. 이렇게 되면 방법이 없다. 집주인에게 상황을 설명했더니 은행에 다시 가보란다. 아놔.
세입자포털에 들어가서 은행 등록을 초기화하려고 했더니 그건 불가능했다. 은행을 추가하는 건 가능한데 삭제하는 건 불가능하다. 아… 수수료를 내고 카드를 등록해야 하나. 그럴 수는 없다. 다시 은행을 인증하고 지불 단추를 눌렀다. 이틀 뒤 Payment Failure. 다시 인증하고 지불. Payment Failure. 그래 누가 이기나 보자.
신기한 건 집주인은 단 한 번도 독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런 일을 자주 겪는다는 느낌이다. 나보고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하란다. 헐.
생각을 해 보니 은행 계좌가 하나 더 있었다. 자투리 돈을 모아둘 요량으로 만든 세이빙 계좌였다. 이걸로 다시 해볼까. 단 이번에는 자동 인증이 아니라 매뉴얼로 인증을 요청했다. 인증 완료. 그리고 지불. 이번에는 이틀 뒤 메일이 오지 않았다. 세입자포털에 들어가 보니 Failure가 아니라 In Processing이라고 돼 있다. 그리고 다시 사흘 뒤 지불이 완료됐다.
결국 인증이 문제였다. 하지만 세입자포털도 은행도 이 문제를 인지하지 못했다. 아니 그전에 인증이 문제였으면 인증 자체가 되지 않아야 하는 거 아닌가. 내 이메일 함에는 인증이 완료됐다는 컨펌 메일이 수십 개가 들어와 있다. 모두 쓸모없는 컨펌이었다. 제 명에 못 살겠다.
고난과 역경의 증거. 도대체가 글러먹었다.
그래도 이건 처음에만 겪는 진입 장벽일 뿐이다. 일상적인 서비스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다.
딸아이 핸드폰이 맛이 가서 애플 매장에 갔다. 그래. 미국이니까 방문 예약도 따로 했다. 핸드폰을 사고 바로 와이프를 픽업하러 가야 해서 시간이 별로 없었다. 입구에서 고객을 맞이하는 직원이 예약을 확인하고 저쪽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아무도 오지 않는다. 직원들이 이삼십 명이 있는데 대략 열 명이 이상이 놀고 있다. 노는 사람들 중에 책임자로 보이는 한 명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핸드폰을 사려고 하는데 계속 기다려야 하나?
오케이. 이름이 뭐지?
경래 K Y U N G L A E.
라스트 네임은 뭐지?
킴 K I M.
오케이. 여기 있네. 기다려라.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나.
곧 갈 거다. 기다려라.
하릴없이 전시된 아이패드를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온몸에 문신을 하고 입술에 피어싱을 한 직원이 다가온다.
오래 기다렸다.
오케이. 반갑다.
핸드폰을 사려고 한다.
오케이. 이름이 뭐지?
경래 K Y U N G L A E.
라스트 네임은 뭐지?
킴 K I M.
오케이. 여기 있네.
직원은 딸아이 핸드폰을 이리저리 확인하고 이것저것 묻고 나서 말했다. 기다려라. 하이고. 10분 정도를 기다리다가 견디지 못하고 다시 직원에게 갔다.
어떤 직원이 왔다가 가서 오지 않는다. 얼마나 기다려야 하나.
오케이. 이름이 뭐지?
경래 K Y U N G L A E.
라스트 네임은 뭐지?
킴 K I M.
오케이. 여기 있네. 기다려라.
아놔. 기다렸다. 이번에는 저쪽에서 놀고 있던 몸집이 큰 직원이 다가왔다. 파이널리. 이 사람이 진짜 담당이었다. 딸아이가 데이터를 미리 백업해 놨기 때문에 실제로 핸드폰을 구매하는 시간은 5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십여 명의 직원들이 놀고 있지만 아마 정해진 규칙이 있는 모양이었다.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눈에 보인다고 아무 직원이나 고객을 응해하지는 않았다. 모든 고객 응대 과정은 세부적으로 분류돼 있고, 노동자는 딱 자기가 해야 할 일만 하는 식이다. 노동강도를 생각하면 직원들에게 좋은 시스템이지만 소비자 입장에서는 답답해 복장이 터지는 상황이다. 어쩌겠나. 기다려야지.
내가 미국을 이상하게 생각하듯이 미국 사람이 한국에 가면 이상하게 여길 게 한두 개는 아닐 거다. 미국 시스템이 이렇게 정착된 데는 다 이유가 있을 거다. 그 이유를 지금 내가 모를 뿐이다. 하지만 앞으로 4년이 지나고 한국으로 돌아갈 때쯤, 그때는 그 이유를 알게 될까. 그렇게 알고 싶지도 않다. 지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