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년도의 여름은 유난하게 더웠다. 아스팔트에서 후끈한 열기가 올라왔고, 눅눅한 공기가 무겁게 느껴졌다. 아르바이트가 끝난 후 버스를 타고 자취방으로 돌아오는데, 잠시 걷는 3분 때문에 땀이 줄줄 났다. 한 발자국에 땀 한 방울, 또 한 발자국에 땀 한 방울. 땀에 젖은 티셔츠가 불쾌하게 휘감겼다.
더위와 노동에 시달린 몸뚱이는 자취방에 들어가자마자 한없이 늘어졌다. '아, 드디어 쉴 수 있는 곳이다.' 에어컨을 켜고 냉장고에 편의점에서 사 온 맥주 두 캔을 넣었다. 빠르게 샤워를 하고, 멱살잡이라도 한 것처럼 목이 늘어난 티셔츠와 여기저기 구멍이 난 바지로 갈아입었다. 그다음, 냉장고에 미리 넣어둔 맥주를 경건하게 꺼냈다.
물기가 송골송골 맺힌 매끈한 표면을 손으로 훑어보고, 힘차게 캔 따개를 뒤로 젖혔다. 치익! 과 딸깍! 사이의 경쾌한 소리가 울렸다. 마음 같아서는 맥주캔을 100개쯤 까면서 치익-딸깍! 하는 소리를 듣고 싶다. 웬만한 비트보다 감각적이고, 경쾌하면서도 경박하지 않다. 듣고 있으면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 같다.
맥주를 까고 나서는 목이 따가울 때까지 벌컥벌컥 들이켰다. 첫 입은 무조건 목구멍 열고, 벌컥벌컥 들이켜야 제맛이다. 그 시원함에 눈물이 고일 때쯤, 맥주캔을 입에서 떼니 캬-하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별다른 안주도 없이 맥주를 홀짝이며 노트북으로 글도 쓰고 웹서핑을 했다. 당시 같은 고시텔에 살던 언니가 “너 엄청 자유로워 보인다!”라고 했다. 그 말이 마음에 콕 박혔다. 그 순간만큼은 정말로 자유로운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다음 날 새벽 5시에 일어나 아르바이트를 가야 하고, 또 그다음 날도 가야 하고, 개강을 하면 학교도 가야 하지만. 그 순간은 온전하게 자유롭고 편안했다. 나한테 혼술은 가장 자유로운 순간이자,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쓸 필요가 없는 편안한 상태다.
국내 1인 가구가 늘어남에 따라, 혼자서도 즐길 수 있는 여러 가지 문화들이 주목받고 있다. 그중에서도 혼자 술을 마시는 것은 대표적인 1인 문화다. 개인주의 성향을 가진 2030 청년들과 코로나 19의 영향으로 주류 문화에서 '혼술'이란 빠질 수 없는 키워드가 되었다.
아직까지 집에서 혼자 술을 마시는 게 청승맞다거나, '혼술은 알코올 중독증의 초기 증세'라는 의견을 가진 사람이 종종 있다. 물론 나는 그 의견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싶다.(“이건 중독이 아니라 사랑이라고!”) 내게 혼술이란 편안하고, 깊은 휴식과 비슷하다.
혼술은 장소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바로, 집에서 마시는 혼술과 가게에서 마시는 혼술이다. 주로, 후자가 좀 더 높은 레벨의 혼술러로 평가된다. 나는 집순이 기질이 다분하기 때문에 주로 집에서 마시곤 한다. 핀란드에서는 집에서 혼자 술을 마시는 행위를 보다 본격적인 용어로 정의한다. 바로 '팬츠드렁크'다.
'팬츠드렁크'란 속옷을 입고 술을 마시는 것을 말한다. 정확히는, 편안한 상태에서 술을 마시며 휴식을 취하는 것을 일컫는다. 팬츠드렁크는 핀란드의 문화이자 셀프케어 비법이다. 나는 핀란드인은 아니지만 팬츠 드렁크를 즐긴다.
고단했던 하루의 술 한 잔은 보상과도 같다. 일과를 끝내고, 정결한 마음가짐으로 마시는 술 한 모금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다. 싸르르하게 식도를 훑고, 이내 뱃속에 뜨끈하게 퍼지는 알코올을 무엇으로 대체할 수 있겠는가.
혼술과 관련하여 많은 사람들이 어디에 방점을 둘지 착각하곤 하는데, 그건 바로 혼술의 목적이다. 단순히 '술을 마시고 싶어서' 혼자 마시는 게 아니다. 대부분은 '혼자' 술을 마시고 싶어서, 혼술을 한다. 세상에는 많은 맛있는 술이 있고, 술을 맛보기 위해서 매번 사람을 만난다는 건 얼마나 피로하고 품이 많이 드는 일인가. 다른 사람과 마시는 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다. 혼술과 함께 마시는 술이 다른 영역에 속할 뿐이다.
편안한 공간에서 술을 마시면 몸이 기분 좋게 이완된다. 걸친 옷은 가볍고, 거슬리는 소음이 없고, 익숙하고 아늑한 공간이 깊은 편안함을 준다. 집이라는 안전지대 속에는 오직 술과 나뿐이다. 술에 집중하고, 그럼으로써 주어진 순간에 집중한다. 하루 종일 함께하던 잡념과 사념이 씻겨 내려간다. 마시는 행위는 큰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기 때문에, 혼술은 쉽게 소소한 행복을 안겨준다.
프로 집혼술러인 나는 여러 방식으로 혼술을 즐긴다. 가장 보편적인 혼술 방법은 영화나 예능/ 드라마를 보며 술 마시는 것이다. 스스로를 위해 차린 음식과 술 한 잔이면, 언제나 근사한 저녁을 맞이할 수 있다.
반신욕을 할 때도 술을 마시는 걸 좋아하는데, 반신욕은 상큼한 화이트 와인과 잘 어울린다. 냉장고에서 칠링한 화이트 와인을 꺼내 홀짝홀짝 마신다. 뜨끈한 물의 온도와, 가볍고 시큼한 와인의 맛이 적절한 조화를 이룬다. 부담스러운 안주보다는 과일치즈나 과일을 곁들이면 좋다.
책을 읽으면서 맥주를 곁들이는 것도 좋아한다. 일기를 쓰거나 글을 쓸 때도 술이 곁에 있을 때가 많다. 우울하거나 진지한 무드에는 탄산이 적고 쌉싸름한 맥주가, 가볍고 편안한 분위기에서는 상큼한 칵테일 맥주가 어울린다. 개인적으로 편의점에서도 파는 데스페라도스를 좋아한다. 그리고 라거는 언제 어디서나 옳다.
싸이키 조명이 반짝이는 블루투스 스피커로 노래를 틀어놓고, 맥주를 마시며 혼자 막춤을 추기도 한다. 정확히는 신나는 노래를 듣고 있으면 내 몸이 자연스레 반응한다. 다들 혼자 있을 땐 그러잖아요? 가무를 즐기는 건 호모 루덴스의 본능이 아닙니까.
내게 술이란 기분 좋은 순간의 자양강장제와도 같다. 퇴근 후, 냉동실에 맥주를 넣어두는 일, (냉장고에 행복을 채우는 일이라고 부른다.) 잠옷으로 갈아입은 후 맥주를 꺼내는 일, 딸칵하는 맥주캔의 날카로운 소리, 목젖을 찌르는 듯한 첫 입의 싸르르함, 송골송골 물기가 어린 캔과, 푹신한 침대에 몸을 묻고 맥주를 홀짝이는 일, 그 모든 감각을 사랑한다.
이 세상에 맥주와 와인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나는 혼술을 이어갈 것이다. 지금 이 글도 술을 마시며 완성했다. 모두가 잠든, 고요하고 안온한 시간에. 그러니 오늘의 행복도, 이 글을 쓰게 된 것도, 전부 혼술 덕분이다.
물론, 과음은 건강에 해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