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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로 Nov 07. 2024

Wheel four hands

#운전 #유전 #추모의_방법


채영은 비릿한 맛이 나는 입술을 씹었다. 핸들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차 안을 가득 메운 불온한 공기가 콧속을 찔렀다. 그녀는 눈동자만 굴려 사이드 미러를 살폈다. 저만치 뒤에 있던 차가 손에 잡힐 듯이 가까워졌다. 연석을 칠한 붉은색과 흰색이 시야 귀퉁이를 할퀴었다. 중앙선을 사이에 두고 스쳐지나는 사이렌처럼. 상반신이 오른쪽으로 크게 휘청였다.


조금 전만 해도 운전을 즐기자고 다짐했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출발하자마자 내리기 시작한 보슬비를 탓하고 싶지 않았다. 낯선 이국의 도로도 탓하고 싶지 않았다.


‘도와줘, 제발….’


채영은 점퍼 안쪽에 실로 꿰맨 사진을 떠올렸다. 차체가 크게 쿨렁이면서 왼쪽 가슴과 사진이 맞닿았다. 채영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핸들을 고쳐 잡았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공항 내 식당은 한산했다. 안나는 라멘 두 그릇이 놓인 쟁반을 받아 들며 일본어로 인사했다. 큼직한 입매에 걸린 웃음이 시원스러웠다. 흠잡을 곳 없는 발음. 점원도 안나가 한국인이라고는 생각지 못할 것이다.


“더 맛있는 거 먹어도 되는데.”


채영이 젓가락을 건네며 말했다.


“어제 술을 좀 많이 마셔서. 라멘이 딱 좋아.”


그러고 보니 밝은 표정과 달리 눈 밑이 거무스름했다. 입국 대기 심사 줄이 길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채영은 피식 웃으며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탑로더에 넣은 포토 카드였다. 안나는 눈을 의심했다. 그녀가 만화책이며 게임 타이틀을 사들일 때마다 말은 안 해도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던 채영이었다. 누가 그런 채영의 마음을 사로잡았나 궁금해진 안나는 목을 길게 늘였다.


“덕질하는 건 좋은데 눈 좀 높여라. 나이도 꽤 많은 거 같고. 너 오지콤 있었냐?”

“우리 아빠야.”

“너무 잘생기셔서 배우인 줄 알았네. 네가 누굴 닮았나 했더니 아버님 닮았구나.”


안나의 태세 전환에도 아랑곳 않고, 채영은 탑로더를 물컵에 비스듬히 세우고는 사진이 라멘 그릇을 향하도록 각도를 조정했다. 예절샷은 찍지 않았다. 안나는 자기가 한 말 때문에 채영의 기분이 상하지 않았는지 눈치를 살피며 면발을 빨아들였다.


점심으로 간 규카츠 집에서도, 비즈니스 메일을 확인하기 위해 들른 카페에서도 탑로더는 번번이 모습을 드러냈다. 규카츠 집에서는 “먹어 보고 싶었던 거잖아” 하고 조그맣게 말을 걸기도 했다.


안나는 괜히 머쓱해졌다. 즐거워야 할 여행에서 보통은 떠올릴 일 없는 ‘죽음’이라는 단어가 혓바닥 위에 남아 까끌거렸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지금 이 자리에 없는 사람과 행복한 순간을 공유하고 싶다는 마음은 예절샷을 찍는 수많은 이들과 다르지 않았다.


“장소가 장소라 절은 좀 그렇고… 인사로 대신하겠습니다.”


안나는 탑로더를 앞에 두고 고개 숙였다.


“아, 신경 쓰였어? 미안.”

“네가 미안할 거 뭐 있어. 내일이 기일이셔?”

“음, 아니?”


두 사람의 표정이 서로 다른 모양으로 굳었다. 침묵을 깬 것은 채영의 웃음소리였다.


“약속해 줘. 지금부터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다 믿어 줄 거라고.”

“들어 보고.”


채영은 유리잔에 꽂힌 빨대를 저으며 ‘집안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의 운을 뗐다.


채영의 집안에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비현실적인 힘이나 번뜩이는 기지를 발휘해 부와 명예를 거머쥔 사람이 많다고 한다. 비결은 바로 ‘제사’다. 따로 날을 정하지 않고 평소부터 신주를 지니고 다니면서 제삿밥을 섭섭지 않게 챙겨 주면 중요한 순간에 수호령의 힘을 빌릴 수 있다는 것이다. 신주의 형태는 지방에서 초상화에서 사진을 넣은 회중시계에서 포토 카드로 시대에 따라 변해 왔다.


“꿈에 나타나서 로또 번호라도 알려 주셔?”

“그러려면 미래를 볼 줄 알아야 하잖아. 어디까지나 당신이 생전에 갖고 있던 능력을 빙의 형태로 빌려주는 거야.”


반쯤 빈정거리듯이 물었는데 채영의 대답은 너무도 진지했다. 그런 얼굴로 ‘빙의’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니 안나는 채영의 말이 진심인지 자신을 놀리는 건지 알 수 없어졌다.


“그렇다고 치자. 아버님은 무슨 능력이 있었는데?”

“운전을 잘하셔. 택시 기사로도 일했고.”

“운전은 너도 잘하잖아.”

“나랑은 비교도 안 돼. 아빠가 대회 나갔으면 1등 휩쓸었을 걸.”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카페에서 시간을 죽이기에는 꽤 흥미로운 주제였다. 두 사람은 얼음만 남은 잔을 반납대에 놓고 카페 문을 나섰다. 안나는 시간을 확인했다. 행사까지는 한 시간 남짓 남았다. 사고라도 나지 않는 한 충분히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렌터카는 어디서 찾아?”

“여기라는데….”


채영이 말끝을 흐리며 휴대폰을 내밀었다. ‘미안해 할 필요 없다니까.’ 안나는 생각했다. 이번 여행은 항공편부터 숙박까지 채영이 모든 비용을 댔다. 사흘 동안 안나는 일본어를 하지 못하는 채영의 눈과 입이 되기 위해 고용된 존재나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이 렌터카에 타자 앞 유리창 위로 빗방울이 점점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비가 자주 오네.”


채영이 중얼거렸다.


다행히 빗줄기는 더 세지지 않았다. 두 사람이 탄 차는 얕은 물웅덩이를 가르며 중앙선의 왼편을 따라 달렸다. 영어가 없는 표지판을 마주할 때마다 안나는 지명이며 안내 사항을 번역해 주었다. 시내를 벗어나 고속도로에 접어들자 안나가 번역할 것도 줄어들었다. ‘발라드라도 들으면서 가면 좋겠다.’ 하지만 렌터카에 굳이 휴대폰을 연결하고 싶지는 않았다.


“너희 집은 제사 지내?”


나른해지는 것은 운전대를 잡은 채영도 마찬가지인지 아무래도 좋은 질문을 던졌다.


“남들만큼은 지내지.”

“우리 집은 안 지낸다니까.”


‘빙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이다.


안나는 제삿날 풍경을 떠올렸다. 벽지 구석구석 밴 기름 냄새, 보글보글 소리를 내며 끓는 탕국, 제사가 끝나면 비닐봉투에 소분되어 자신의 손에 들릴 과일들. 부엌과 거실을 오가며 제기를 나를 때마다 안나는 지방에 쓰인 한자의 의미가 궁금했다. 어릴 때부터 일본어를 공부해 한자라면 자신 있었지만 두 가지는 별개의 문제였다.


언제였더라. 제사의 허례허식을 비판하는 기사를 읽다가 문득 생각나 지방의 의미를 검색했다. 정성스럽게 쓴 스무 글자 가운데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개성을 드러낼 만한 글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할머니는 무엇을 잘했더라? 할아버지는? 엄마를 따라 전을 부치고 제기를 닦는 동안 정작 할머니와 할아버지에 관해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어제 일도 있어서 피곤하잖아. 내가 운전해도 되는데.”

“난 운전 좋아하니까 괜찮아. 나중에 행사장 가서나 잘 부탁해.”


두 사람이 탄 차는 호텔 앞에 멈춰섰다. 우산을 사야 하나 걱정했지만 다행히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말끔했다. 행사가 한두 개가 아닌 모양인지 호텔 로비에는 안내판이 줄지어 서 있었다. 안나가 그중 하나를 가리켰다.


연회장으로 들어서려던 채영의 표정이 밝아졌다. 한국 기자들이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채영은 행사 관계자를 따라 발걸음을 옮기며 가볍게 고개 숙였다. 두 사람은 각각 안내받은 자리에 앉았다. 안나는 익숙한 손길로 수첩과 필기구를 세팅했다.


“첫 우승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미소를 머금은 얼굴 위로 플래시 세례가 쏟아졌다.


“쭉 선두를 유지하다가 마지막 랩 헤어핀 코스에서 스핀이 날 뻔했는데요. 어떻게 위기를 벗어나셨나요?”


채영은 안나가 있는 쪽을 흘끗 쳐다봤다. 안나는 하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채영은 모직 재킷 안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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