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세삼 Jan 03. 2024

매표 지옥




3관과 4관 사이의 바닥을 쓸고 있는데 매니저가 찾아왔다.

- 00씨, 관리자 한 번 해볼래요?

관리자라... 고민해 보겠다 말했지만, 속으론 이미 관리자가 된 스스로를 상상하고 있었다.


나는 영화관 일이 좋았다. 공간은 생기 넘치고 동료들은 활동적인 데다, 일은 재미있었고 영화도 좋아하니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나는 이미 매점과 플로어를 거치며 꽤 유용한 스텝이 되고 있던 터라 자신감도 있었다. 하지만 관리자를 하고 싶은 가장 큰 이유는 매슬로의 욕구 4단계* 때문이었다.

* 존경과 인정받기 원하는 인간의 욕구.



관리자가 되기 위해선 매표 업무가 필수이기 때문에 나는 곧바로 교육이 진행되었다.


'질문에 대답 못하면 어쩌지?‘

‘실수해서 클레임 받으면 어쩌지? ’

‘마음에 안 든다고 관리자 불러달라면 어쩌지?'


오로지 머릿속에는 불안한 생각만 자리했다. 다행히 이론은 금방 습득해서 현장 교육을 바로 했지만, 발권 키보드를 조작하는 내 손가락은 아이유의 분홍신처럼 길을 잃었다. 그렇게 떠듬떠듬하는 사이 앞에 있던 고객이 말했다.

- 너무 느려서 그런데 다른 줄로 가도 돼요?



지금이야 앱이나 키오스크가 많이 상용화되어 현장 발권의 기능이 많이 약해졌지만, 내가 일할 때만 해도 현장 예매의 비율이 높았다. 아니 정확하게는 '환불 후 재결제'가 정말 많았다.


할인권, 관람권, 현장 포인트 사용 등등. 앱으로 예매 후 현장에서 환불하고 같은 자리를 재구매하는 건이 많았다. 그래서 입장 시간이 되면 매표소 앞이 인산인해가 되곤 했다. 안되겠다 싶어 관리자가 지원 가면 빠져나올 수 없었고, 조금이라도 늦으면 영화 앞 부분을 놓칠 수도 있다는 심리적 압박감에 이곳이 지옥인가 싶기도 했다.


정말 한 번 들어가면 1시간 연속으로 표만 팔다 오는 경우가 허다했고 몸은 땀으로 범벅이기 일쑤였다. 한 겨울도 예외는 아니었다. 물론 이것은 성수기에 한한 것이고 비수기때는 널널하다 못해 잠이 쏟아질 정도다. 손님이 없으면 매표 스텝은 정말 지루하다. 그래서 매점에서 판매하는 제품 검수도 하고 대기 홀도 쓸며 가끔은 전단지를 정독하기도 한다. 뭐 다른 포지션도 비슷하지만 말이다.




기실 우리 영화관의 매표는 금남(禁男)의 구역이었다.

서비스의 최전선에 있는 포지션이다 보니 말투나 표정(인상)때문에 여 스텝만 채용했다고 한다. 납득할 만한 내용은 아니었지만 생각보다 이 전통(?)은 오랜 기간 이어져갔다(나중에 점장이 되어 남 스텝도 배치하려 했지만, 중간 관리자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여 스텝이 많다 보니 타 매점, 플로어 남 스텝들의 관심이 하늘을 찔렀다. (생각해 보아라, 20대 초중반 남녀가 모였다) 용건이 없어도 매표소를 들러 영화 같이 보자고 한다던가, 마치고 밥 한끼 하자던가 등의 수많은 찔러보기와 간 보기가 넘쳤다. 이런 상황에 내가 매표에서 교육을 받고 있으니, 남 스텝들의 사랑의 오작교 부탁도 많이 받았다. 어쨌든 그렇게 사귄 스텝도 있고, 아닌 스텝도 있었는데 무엇보다 우리 영화관만의 연애 공식(?)이 들려 흥미로웠던 기억이 있다.


그중 몇 개를 이야기하자면,


1. 남녀 스텝이 영화를 3회 이상 같이 보면 사귀는거다.

2. 전혀 관심 없는 두 사람이어도, 영화를 3회 이상 보면 사귀게 되더라

3. 플로어 마감을 남녀가 하면 없던 마음도 생긴다

4. 주간반엔 꼭 한 커플이 생긴다.


듣다 보니 너무 정확해서 소름 돋았다. 이 말을 듣던 그 순간 내 앞에 팔짱 끼며 지나가는 저 두 스텝도 주간반이었으니까.


이런 이야기도 있었다. 신규 매표 스텝의 남자친구가, 거기는 여자밖에 없어서 마음이 놓인다며 말했단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나 그 스텝은 다른 남 스텝을 만나 사귀게 되었다는 엔딩. 전 남자친구가 방심한 건지, 남자친구가 있는걸 알면서도 대시했던 이 스텝이 상도를 어긴 건지...



어쩌다 보니 연애 이야기로 흘러갔는데, 매표가 여 스텝만 있다 보니 특히 남자 손님들이 깔보는 경향이 있었다.


한번은 관리자 지원 무전이 다급하게 와서 나가보니 중년 남성이 스텝에게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빠르게 손님과 스텝 사이로 들어가 무슨 일이냐, 나에게 말해보시라 했더니 조용해졌다. 그 손님이 간 후 자초지종을 스텝에게 물으니, 억울해 죽겠다며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관리자님이라 똑같이 응대했는데, 가시나가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고함을 질렀다는거다. 나는 괜찮다고 저런 이상한 손님이 더러있다 했지만, 웬걸 이런 남자 손님이 많다는 거다. 남자 스텝이나 관리자와 있으면 티켓만 사가면서, 본인들만 있으면 치근덕대거나 윽박지르거나 욕설을 한다는 거다.


머리가 핑 돌았다. 더러 있다고 표현한 스스로가 부끄럽고, 비일비재하다는 사실에 충격이어서 말이다. 혹시나 해서 동료 여 관리자에게 물어보니 자기도 그랬단다. 지금도 클레임 해결하러 나가면 여자라 무시하는데 스텝일 땐 어땠겠냐며 한숨을 푹 쉬었다.


“애들(스텝)을 지키겠다는 마음으로 단단해지려 노력하는 거지, 손님들 눈에는 저희도 ‘그냥 여자’에요”



나는 영화관 일이 좋았다. 공간은 생기 넘치고 동료들은 활동적인 데다, 일은 재미있었고 영화도 좋아하니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이 날 이후 싫어할 이유가 하나 생겼다. 변하지 않는 인식과 차별이 내 근처에 있는 것을 보고 혐오감도 느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앞에서 막아 주는 것.

그리고 그때부터 고객을 더 이상 왕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전 04화 기억에 남는 영화관 고객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