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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세히 Mar 21. 2022

아파트는 보편적인 삶

‘평균’이라는 큰 울타리 안을 걷는 기분이다.

지난 주말에 시골집에 다녀왔다. 본가에 내려간다고 하면 사람들은 왠지 당연하게 농사짓는 부모님과 조용한 주택, 마당에 큰 개 한 마리를 떠올리지만 우리 집은 4개의 아파트가 한 데 모여있는 대단지이다. 물론 남원은 아주 작은 동네라 서울에 비할 수 없이 사람이 적고 조용한 것이 사실이다. 한없이 늘어지는 평일 오후의 낮잠처럼 단조롭다. 그 단조로움이 지루하고 답답해서 이곳을 떠났는데 이제는 이 한적함에 숨통이 트인다. 떠나서 산 시간이 길어서인지 '지금보다 나이가 들면 이런 곳이 살기 좋겠지?' 시골에 잠시 놀러 온 관광객의 마음으로 바라보게 된다. 이 작은 도시가 내게 평화로움을 주는 것은 단순히 고요함 때문만은 아니다. 늦은 저녁 아파트 단지를 크게 한 바퀴 돌며 산책을 할 때면 더 큰 평온함을 느낀다.


아파트 단지는 보편적인 삶에

속해 있다는 안정감을 준다.

‘평균’이라는 큰 울타리 안을 걷는 기분이다.


서울에서의 삶은 10년을 꽉 채워 살아도

여전히 나를 뜨내기에 머물게 한다.


역시  때문인 걸까. 며칠  전세 대출금 만기 도래 알림을 받았다. 떨리는 마음으로 집주인과 통화를 하고 보증금 천만 원 인상으로 다시 2년의 시간을 벌었다. 아파트, 빌라, 원룸 크기에 상관없이 전세 매물이면 무조건 턱없이 올랐다던데 우려했던 것보다는 합리적인 수준의 인상이었다. 분명 다행스러운 일인데 마음이 더부룩하다. 2년의 시간만 겨우 유예했을  결국  집도 떠나야  순간이  것이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이상 떠나지 않아도 되는 마지막 정착지가 내게 있을까? 하고 물으면 긍정적인 답을 내놓기 어렵다.     


저녁 9시만 돼도 남원은 어둡다. 유동인구가 많지 않아 가게들도 일찍 문을 닫고 다니는 차가 없어 도로 위 점멸등만 깜박거린다. 하지만 단지 안 산책길 가로등은 환하게 밝다. 저녁 식사를 마친 가족들이 소화를 시킬 겸 늦은 산책을 나온다. 평화롭고 조용한 길을 따라 걸으며 이곳에 남았다면 어땠을까 가능성 없는 일을 상상한다. 이곳에 돌아오면 어떨까 아까보다는 조금 더 가능성 있는 상상도 한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든

가슴속에 사직서를 품고 산다는데

서울살이를 택한 상경인들은

가슴속에 귀향을 품고 산다.


사직서가 ‘언젠가 던져야지’ 숨겨둔 패라면

귀향은 ‘결국엔 던지고 마는’ 백기 같은 거다.


백기를 손에 꼭 쥐고 아파트 단지를 빙 둘러 산책을 한다. 이 안을 걷는 순간만큼은 우선 평균의 삶이다. 흔하고 평범해서 단조로운, 그래서 평화로운 보편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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