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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은경 Oct 28. 2022

억만금을 주더라도 찾아오고 싶다

나는 어렸을 때 외갓집에 가는 걸 좋아했다. 그때는 아침에 군산에서 출발하면 저녁 무렵에 서울에 도착했다. 기차를 타는 것도 재밌었고 서울에는 신기한 게 많았다. 내가 초등 4학년 학생일 때 엄마 아빠는 내 집을 마련했다. 그전까지는 단칸방에 살았는데 외갓집은 방이 많아서 좋기도 했다. 그때는 느끼지 못했지만, 지금은 좋았다고 느낄 수 있는 점이 또 있다.

     

서울역에 도착하면 항상 외할아버지가 있었다. “회숙이(엄마 어렸을 때 이름) 왔냐.” 할아버지의 인사는 한결같았다. 일 년에 한 번이나 만나는 딸이 얼마나 그리웠을까. 할아버지는 인생을 즐기며 사시는 분이셨다. 그래서 외할머니가 힘들었지만. 여자에게 예쁜 속옷이 필요하다며 사다 줄 정도로 딸을 귀하게 여겼다. 비록 월사금 날짜는 매번 놓쳤지만 여자도 공부해야 한다고 학교에 보냈다.

     

그러던 딸을 시집보내고 할아버지는 허전한 마음을 달랠 새도 없었다. 할아버지가 서울로 이사 가기 전 군산에 살면서 지척에 둔 딸을 마음껏 만나지도 못했다. 유난스러운 시어머니에 대한 소식을 전해 들을 때마다 어땠을지 이제는 할아버지 마음이 이해된다.

     

그때는 모두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시어머니의 시집살이에 외할아버지는 꾀를 낸 적이 있다. 이모를 엄마에게 보내 외할아버지가 몹시 아프다고 전하고 데려오라고 한 것이다. 그때 시아버지인 할아버지가 이렇게 말했다고 했다. “여자는 결혼하면 부모상 당하기 전까지 친정으로 발걸음 하는 게 아니다.” 그러고는 방으로 들어갔다고.

     

나와 동생은 이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분노하는데, 그 당시 외할아버지는 어떠셨을까. 나중에 이모에게 들었는데 외할아버지는 “물건이면 억만금을 주더라도 찾아오고 싶다.”라고 말했다고 했다. 경제적으로는 풍요롭지 못하게 키웠지만 마음으로는 정성을 다해 키운 딸이 얼마나 아깝고 안타까웠을지.

     

내가 어릴 때 외갓집을 좋아했던 이유가 이제 이해되었다. 넓은 집이나 새로운 물건이나 경험도 좋았지만 엄마는 그곳에서 ‘소중한 딸’이었다. 할아버지는 연신 “회숙이 많이 먹어라.”라고 말했고 외할머니는 말없이 딸을 챙기는 모습이 어린 나에게도 미처 알지도 못하면서 느껴졌던 것이다.

     

우리가 군산으로 돌아오는 기차를 탈 때 매번 검정 비닐봉지를 여러 개 건네주었다. 그 비닐봉지에는 꽈배기 도넛, 김밥, 찐빵 등이 들어 있었다. 외갓집에 머무르는 동안 내내 많이 먹고 멀미가 심한 엄마는 먹지도 못하지만, 할아버지는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그것들을 준비했다.

     

부모에게 자식은 그런 존재이다. 항상 마지막까지 무언가를 주고 싶은. 오늘은 외할아버지의 “회숙아”라고 부르는 목소리가 많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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