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은경 Oct 28. 2022

원망스러웠던 역사 선생님

강물이와 마이산의 육아를 엄마랑 같이했다. 자연스레 아이들의 학교 이야기를 같이 나누고 준비물 등을 같이 챙겼다. 내가 그 나이였을 때 엄마랑 나누지 않은 이야기를 아이들 육아하면서 같이 나눌 기회가 많았다.

     

학원을 하면서 중학생 아이들을 많이 접한다. 초등학생과 중학생은 옷차림부터 다르다. 색색의 초등학생들이 무채색의 중학생으로 변한다. 모두가 그렇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중학생은 검은색이다. 모자, 티셔츠, 바지 심지어 신발까지 검은색이다. 나는 강물이와 마이산이 중학생이 되어서도 색채는 유지하기를 바랐다. 그러기 위해서는 색을 많이 알고 색에 거부감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이유로 아이들의 색연필이나 크레파스를 사줄 때 색의 개수가 많은 걸로 구입했다.

     

하루는 엄마가 그 크레파스를 보면서 이야기했다. 엄마는 교과서로만 수업하는 시간이 가장 편안했다고. 미술 시간, 가정 시간 등이 싫었다고 했다. 지금은 수업준비물을 학교에서 다 지급해준다. 내가 초등학생일 때도 개개인이 준비해야 했고 엄마가 학생일 때는 말할 것도 없다. 미술시간에 크레파스를 준비하지 못한 엄마는 친구들 것을 빌려야 했다. 그림을 완성해야 하는 시간은 한정되어있고 친구들이 사용하지 않는 색을 빌려야만 했으니 엄마의 그림은 언제나 색이 특이했다. 좋게 말해서 특이한 거지 그 또래의 아이들은 비슷한 걸 좋아하는 나이이다. 나중에 양장점에서 일할 때 솜씨와 색감이 뛰어났던 엄마가 쓰고 싶은 색을 사용하지 못하고 그림을 그릴 때 얼마나 속상했을까.

     

엄마는 학창 시절 이야기를 하면서 추억이 별로 없다고 했다. 그때는 중학교에 다닐 때 월사금을 내야 했는데 엄마는 항상 기한을 넘겼다고 했다. 다른 선생님들은 그냥 수업하는데 꼭 ‘역사 선생님’은 월사금을 납부하지 못한 학생들을 복도에 세워두거나 심지어 하교시키기도 했다. 선생님이 집에 가라는데 학생이 도리가 있을까. 엄마는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오면 큰외삼촌이 성화였다. 기한을 넘기더라도 월사금을 납부하는데 수업을 못 듣게 하면 되냐고 다시 학교로 가라고 호통을 쳤다고 했다. 학교와 큰외삼촌 사이에서 중학생이 엄마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얼마나 힘들었을까.

     

엄마가 학교 다닐 때는 영화를 단체 관람하기 위해 극장에 가는 날이 있었다. 학교마다 영화표 요금이 달랐는데 전교생의 숫자에 비례했다. 엄마는 영화 보는 날에 단 한 번도 극장에 가지 못했다. 영화표 요금도 없었지만 시간 여유가 조금이라도 더 있는 날에는 밀린 집안일을 해야 했다. 그 당시 엄마는 장사하는 외할머니를 대신에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해야 했다.

     

나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학창 시절 이야기가 이것 말고도 더 있을 것이다. 내가 학부모가 되어 듣는 엄마의 학창 시절은 참 마음이 아프다. 강물이와 마이산과 같은 나이대의 어린 엄마와 지금의 나와 같은 나이대의 외할머니의 심정이 이해되어서이다. 나는 책, 드라마와 영화를 반복해서 보는 걸 좋아한다. 십수 년 전에 보았던 드라마 <육남매>나 영화 <내 마음의 풍금>을 요즘에 다시 볼 때 나는 외할머니와 엄마를 볼 수 있다. 다음 생이 있다면 나는 이들을 보듬어주고 싶다.

이전 03화 외할아버지 셔츠로 만든 교복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