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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2. 그 해 성탄절은 포근했네

추억은 방울방울, 성탄절의 기억도 방울방울

나이가 나이인지라, 지금까지 많은 성탄절을 보냈다.

성탄절에 대한 최초의 인지는 아마도 국민학교 4학년 때 쯤이었을 것 같다.

동생들은 성탄절이 무슨 날인지도 모를 때, 식자우환이라고 아는 것이 병이 되었던 시골에서 책 좀 읽었던

아는 언니였던 나는 성탄절이 모옵시 기다려졌었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으나, 아버지가 사다 나르던 소년중앙과 어깨동무에서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글로 배우고 큰 집 언니들이 보던 리더스다이제스트와 TV가이드에서 연예계 소식과 글로벌한 세계의 흐름을

야금야금 알아가던 11살 소녀는 크리스마스 전 날 밤 비장한 각오로 양말을 걸어두었다.


"여기에 양말을 걸어 놓으면 낼 아침에는 양말에 선물이 들어 있을거야"


엄마는 결혼 할 때 혼수라고는 장농한개 밖에는 해오지 못하셔서 고모들에게 구박을 받으셨다고 했다.

엄마의 외갓집은 부자중에 부자였으나, 나의 외갓집은 가난했고, 외할머니는 엄마에게 혼수로

장농 한 개 밖에는 해주질 못했다.

 

엄마의 장농은 특이하게도 쇠로 만들어진 철제 캐비넷이었다.

문이 세짝쯤 있었고, 손잡이는 무얼 걸어두기에 딱 좋은 사이즈였다.


엄마 아빠에게 여기에다 양말을 걸어둘테니 잘 보시오 라는 선전포고를 하고 잠이 들었고

내 말에 웃었던 아버지가 기억난다.


다음 날, 양말은 텅 비어있는 체로 철제 캐비넷에 얌전히 걸려 있었다.

누가 다녀 간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던, 실망과 사기를 당한듯한 씁쓸한 첫번째 크리스마스의 추억이다.


두번째 크리스마스는 고등학교 2학년 때이다.


명산동 사거리에서 근무를 서던 아버지가 집으로 전화를 해서 우리더러 해태당 앞으로 나오라고 하셨다.

눈이 펑펑 내리던 크리스마스이브였다.

삼학동 우리집에서부터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나부터 초등학교 2학년이던 막내까지 다섯명의 아이들은

명산동 사거리의 해태당까지 눈길을 소리지르면서 뛰어서 갔다.


그때는 형사였던 아버지

내가 봐도 멋졌던 아버지였다. 퇴근할 때는 언제나 해태당의 빵봉지가 한 손에 들려져 있었고

우리는 밤중에 빵을 먹는 재미로 아버지를 기다렸다.

새로운 먹을거리는 늘 아버지의 한쪽 손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되었다.

군산하면 이성당인것같아도, 숨겨진 맛집 빵집들이 많은 곳이 군산이다.

조화당 빵도 맛있었고, 해태당도 맛있었던 빵집이었다.

퇴근하는 길과 겹쳐 있는 해태당은 우리 아버지의 단골 빵집이었고, 크리스마스 전날 근무를 하게 된

아버지는 아쉬운 마음에 우리에게 빵을 사주려고 밤중에 불렀던 것이다.

아버지에게 빵봉지를 건네받고 세상에 무서울게 없던 우리 다섯명은 눈길에 넘어지기도 하고

노래도 불러가면서  이십분 정도 되는 우리 집으로 다시 돌아갔었다.

선물을 받지는 못했지만 내가 기억하고 있는 가장 행복했던 크리스마의 추억이다.


그때는 몰랐다.

집에 들어오지 못하고 밤새 근무를 하는 가장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아이 다섯이 주는 무게가 어떤 것인지를 알 수도 없었고 알 필요조차 없었던 고2때였다.

그리고 진짜 몰랐던 것은 그 후 3년 뒤에 아버지가 오락실을 하게 될 줄은 더더욱 몰랐었다.


http://blog.daum.net/sesmam87/470 "나는 오락실집 딸이었다"


세 아이를 키우면서 선물을 감추어 두었다 주기도 하고 그럴듯한 말로 산타의 존재를 믿게도 했지만

셋중에 가장 영특하고 눈치가 빨랐던 둘째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 차 트렁크에 숨겨둔 콩순이 셋트를 보고

산타가 엄마 아빠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고 했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기억나는 세번째 크리스마는 2018년 교토에서 보냈던 성탄절이다.

2018년에는 교토에서 혼자서 성탄절을 맞이할 뻔 했으나, 토상의 집에 초대를 받아서

선교사인 토상의 집에서 만두전골을 먹었다.

천황의 생일은 공휴일이지만, 성탄절은 공휴일이 아닌 일본은 크리스마스 한정 상품은 쏟아져 나오나

딱 거기까지, 가게의 장식만 좀 바뀔 뿐 도시전체가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풍기고 그러지는 않는다.


전형적인 일본식 단독주택이었던 토상의 집은 엉덩이가 몹시 시려운 바닥난방이 안되는 집이었다.

지금은 요코하마에 있는 교육대학원에 진학했을 리페이와 우루무치에서 의대를 졸업하고 도야마에 있는

의대에 진학했을 에상과 한국 아줌마인 나 그리고 집주인 토상과 그의 부인과 함께 패딩을 입고서도

얼굴이 시려웠던 거실에서 만두전골을 먹었다.

만두전골에 들어 있던 김치는 특별히 나를 생각해서 니죠죠 근처의 한인마트에서

사다가 넣고 끓였다고 했었다.

초대에 대한 답례로 보로니아의 식빵을 직원 할인가로 사서 들고 갔었다.


왼쪽부터 집주인 토상, 리페이,나, 에상


우리반 일등이었던 리페이는 중화사상에 쩔어있는 것 같았던 재수탱이 대륙의 딸네미였는데 토상 집에서

얘기를 오랫동안 해 보니 애가 참 괜찮았었다.

에상이야 우루무치 소수 민족 출신의 중국 의대 출신이었지만, 중국에서는 의대를 졸업했다는 것이

우리나라처럼 장래가 보장되는 특별한 의미는 아니었기 때문에 일본으로 재유학을 왔지만

일본어학교에서 공부보다는 일본의 상품들을 중국으로 판매하는 소규모 무역상 일을 하면서

수입을 올리고 있는 아이였다.


우리 엄마의 자개장롱 문짝이 떡허니 상으로 나와 있던 토상의 거실에서 우리들은 모처럼 아르바이트도 잊고

시험도 잊고, 말도 안되는 일본어로 떠들면서 성탄절을 보냈다.

참 특이한게, 중국애들이 하는 일본어는 알아듣기가 더 힘들다.

같은 일본어라고 해도 한국 사람이 하는 일본어를 알아듣는게 더 쉽다는 것이 모를 일이다.


6시까지 알바를 하고 토상네 집에 가서 저녁을 먹고 쌔하게 추운 교토의 밤을 뚫고 버스를 타고 다시 돌아왔던

2018년도의 교토에서의 성탄절이 내 생애 기억나는 세 번째 성탄절이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성탄절을 보낼 수 있을지

그렇지 않을 지 모르지만


'그 해 성탄절은 포근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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