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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의 별 – 2권 1부 28화

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첫사랑? - (28)

by 태양을 품은 별

토요일과 제헌절이 겹쳐 이틀연속 쉴 수 있었다. 문승협은 3주째 연락 없는 정난희가 보고팠다. 아침 8시 즈음 집을 나섰다. 버스에 올라 정난희를 만나게 해달라고 속으로 기도했다. 버스기사가 라디오를 틀었다.

‘지난 7일 국내최초 민간은행인 신한은행을 설립한 데 이어, 다음 주 경제장관협의회에서 제일은행과 서울신탁은행을 9월부터 민영화하기로……. 서울잠실종합운동장옆에 잠실야구장이 준공되어…….’

야구를 좋아하는 문승협이지만 뉴스가 들리지 않았다. 설레는 마음으로 정난희와 만남을 상상하였다. 도착할 때까지 외출하지 않기를 빌었다. 버스가 정난희집 근처에 다다를 무렵, 아침부터 잔뜩 낀 먹구름틈새로 포슬포슬 비가 내렸다. 날씨생각 없이 단단히 마음먹은 일이라, 우산이 없어도 장애 되지 않았다. 앞만 보고 가는 황소처럼 버스에서 내렸다.

버스정류소에 차양이라도 있으면 비를 피할 텐데, 동그란 철판에 ‘버스’라고 써진 푯말만 덩그러니 서있었다. 보슬비를 맞으며 주위를 유심히 살폈다. 행여 못 본 사이에 정난희가 지나갈까 봐 노심초사했다. 우산 쓴 사람들 얼굴을 확인하려 온신경을 집중하였다. 국경일아침이라 행인이 드문 건 다행이었다. ‘목포시’라고 새겨진 차량이 다가오더니, 길거리 깃봉에 매달린 태극기를 걷었다. 건너편에도 비에 젖어 축 처진 태극기들이 순서를 기다렸다. 바람이 불면 몸부림쳐 빗물을 털어냈겠으나 처량히 받아냈다. 비바람악천후 때는 국기존엄성훼손우려로 게양하지 못하는데, 언제 내걸었는지 참 부지런했다. 태극기를 부리나케 걷어가는 공무원들 표정으로 보아 오늘 비예보가 없는 것은 확실하였다. 문승협도 어서 정난희가 나타나 자신을 거둬가길 바랐다.

10분쯤 지나자 다른 길로 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동선을 고려해 정난희집 쪽으로 갔다. 오로지 만나겠다는 일념이었다. 추적추적 옷이 젖어가는 줄도 몰랐다. 소변볼 곳을 찾는 강아지처럼 길모퉁이에서 고개를 쭈뼛 내밀고 정난희그림자라도 찾으려 애썼다. 초여름인데 아침에 내리는 보슬비라 차갑게 느껴졌다. 반팔을 입은 팔뚝에 닭살이 돋았다. 체온이 떨어져 파르르 떨었다.

정난희를 찾아 헤매길 또 20분쯤 지나갔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우산 쓴 실루엣이 등장했다. 반가운 마음에 한걸음 달려가 짠하고 마주 섰다. 정난희가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어맛, 깜짝이야.”

“미안, 놀랐어?”

“오빠, 여기서 뭐 해?”

“하하, 뭐 하긴, 너 기다렸지.”

“이게 뭔 짓이야, 물에 빠진 생쥐처럼.”

“이렇게 잘생긴 생쥐 봤어?”

“지금 농담이 나와?”

“화내지 마, 보고 싶어서 참을 수 없었단 말이야.”

“나 지금 무용연구소 가야 해, 시간 없어.”

“알았어, 이렇게라도 봤으면 됐어.”

“이 손수건으로 좀 닦아, 이게 뭐야, 완전 젖었잖아.”

“…….”

“가자, 시간 없으니까, 일단 버스타자.”

문승협은 감동까진 아니더라도 반가워해줄 줄 알았다. 정색과 걱정을 반복하는 정난희태도에 금세 의기소침하였다. 건네받은 손수건으로 대충 얼굴을 닦으며 버스를 탔다. 나란히 앉아 눈치를 살폈다.

“저 저기, 등산 다녀와서 별일 없었어?”

“응, 별일 없었어. 나 지금 심란하니까, 말 걸지 마.”

정난희가 무용연구소 근처 정류소에서 아무 말없이 내렸다. 문승협도 조용히 뒤따랐다. 정난희가 주위를 살피더니 우산으로 가려 둘만 얼굴을 보게 했다.

“나 지금 엄청 화났거든, 내 말 잘 들어.”

“…….”

“저쪽 길로 해서 석빙고로 가, 난 이쪽 길로 갈 테니까.”

“석빙고?”

“응, 내가 언제 갈지 모르지만, 일단 가서 기다려.”

“알았어.”

“자, 이 우산 갖고 가.”

“아냐, 난 이미 젖었으니까, 네가 쓰고 가.”

문승협은 말을 마치자마자 뛰었다. 자신의 깜짝 출현을 탐탁지 않아 해서 서운하였지만, 쫓아 보내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 여겼다. 조금 있으면 정난희를 마주한다는 생각에 미소가 절로 나왔다.

석빙고문을 여니, 후줄근한 첫 손님에 놀란 종업원이 반갑게 맞아줬다. 이른 시간이어서 한적했다. 정난희입장을 감안해 눈에 잘 띄지 않는 구석진 자리를 잡았다. 실내에 온기가 있었으나 한기를 달래기엔 시간이 필요하였다. 종업원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보리차를 놓고 갔다. 7월 중순에 걸맞지 않았지만 날씨를 고려한 배려였다. 문승협이 부르르 떨면서 두 손으로 쥐고 한 모금 마셨다. 따스한 기운이 온몸에 퍼졌다.

정난희가 15분쯤 지나 들어왔다. 빗물이 떨어지는 우산을 탁자모서리에 걸쳐놓았다. 누가 볼까 싶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작은 가방에서 타월을 꺼냈다.

“자, 이걸로 물기 좀 닦아, 축축해 보여.”

“괜찮은데. 고마워.”

“입술은 파래 가지고 진짜.”

“향기가 난다, 무슨 수건이야?”

“그게 뭐가 중요해. 무용연구소에서 내가 쓰는 거야.”

“…….”

“그 표정은 또 뭐야, 지금 동정심 유발하는 거지?”

“아냐 그런 거. 그나저나 어떻게 나온 거야?”

“아침 안 먹어서 뭐 좀 사 오겠다고 했어.”

“뭐 먹을까?”

“나 아침 먹었어, 오빠나 따끈한 거 좀 마셔.”

정난희가 종업원을 불러 유자차를 주문했다.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문승협을 쳐다봤다. 이 상황을 어떻게 정리할지 궁리하였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이러지 않기로 약속했잖아.”

“미안, 보고 싶고 궁금한데, 3주째 연락이 없으니까.”

“그렇다고, 이렇게 뜬금없는 짓을 해?”

“…….”

“좀 참지 그랬어, 오늘 저녁이나 내일 오전쯤에 연락하려고 했는데.”

“그걸 어떻게 알아, 난 네 계획을 모르잖아.”

“내가 말했잖아, 날 믿고 기다려달라고.”

“…….”

“오빠, 지난주 토요일 학교 끝나고 뭐 했어?”

“응?”

“내 눈 똑바로 보고 말해, 토요일 방과 후에 뭐 했냐고?”

“아, 그게, 저기.”

“왜, 대답하기 곤란해?”

“아 아니, 이 근처에 있었어.”

“그래서, 이 근처에서 뭐 했는데?”

“타 탁구장, 선배들하고 탁구 쳤어.”

“와, 오빠 거짓말도 한다?”

“…….”

“우리 무용연구소는 왜 오랫동안 올려다 본거야?”

“아, 그 그게, 사실은 너 보려고 기다렸어.”

“이제야 실토하는구만, 내가 모를 줄 알았지?”

“알고 있었어? 어떻게 알았어?”

당시 정난희는 무용연구소에 들어가다 길건너편에서 서성이는 문승협을 발견했다. 같이 가던 무용친구들 때문에 모른 척 올라갔다. 무용연습 중 창밖을 몇 번 내다보았다. 문승협을 알아본 무용친구들이 창가에 모여 숙덕였다. 하마터면 무용선생에게 들킬뻔하였다. 친구들 단속하랴 선생눈치 보랴 난감했다. 연습하는 내내 의식되어 무척 곤란하였다.

“그날, 오빠가 내 무용연습에 얼마나 방해된 줄 알아?”

“그 그랬구나, 몰랐어, 미안해.”

“왜 사실대로 말하지 않고 거짓말한 거야?”

“거짓말하려는 건 아니고, 네가 알면 싫어할까 봐.”

“내가 그럴 줄 알고 무용연구소를 안 알려준 거야, 어떻게 알았어?”

“신윤수라고, YMCA탁구장 하는 선배가 알려줬어.”

문승협은 무용연구소 앞에서 기다린 날 정황을 가감 없이 설명했다. 선배들과 탁구 친 것도 사실이라며 항변하였으나, 정난희를 달래기보단 오히려 화를 돋웠다. 종업원이 유자차를 가져와 잠시 대화가 멈췄다.

“뜨끈할 때 마셔, 몸 좀 풀리게.”

“응, 너도 마셔.”

“오빠, 우리 사귀기로 하면서 나랑 약속한 거 있지.”

“응.”

“뭐야, 말해봐.”

“너희 집에는 비밀이니까, 정식으로 소개하기 전까진 함부로 전화하지 말 것.”

“또.”

“사람 많은 곳에선 모른척할 것.”

“또, 진짜 중요한 거 있잖아.”

“만나자 보채지 말고, 무용을 최우선으로 이해해 주기.”

“그래. 근데, 오빠는 그 약속 지킨 거야?”

“…….”

“다시 부탁할게, 앞으로 다신 이러지 마, 알았어?”

“응, 알았어, 안 그럴게.”

“오빠가 이런다고 나 전혀 감동하지 않아, 정말이라고.”

“알았어.”

“다음에 또 이러면, 나 진짜 오빠 안 본다.”

“…….”

“대답해 빨리.”

“아 알았어.”

“나 더 늦으면 의심받을 거야, 먼저 일어날게.”

“자 잠깐, 유자차 마시면서 잠시만 앉아있어.”

문승협이 재빨리 진열장으로 갔다. 이것저것 빵을 골라 비닐봉지에 가득 담았다. 빈손으로 무용연구소에 가면 의심할 거라며 건넸다. 정난희가 뜻밖의 빵보따리에 피식 웃었다. 먼저 갈 테니 남은 유자차를 다 마신 뒤 나오라고 했다. 감기 걸리지 않게 집에 가서 공부하라며 명령조로 말하였다. 문승협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떡였다. 제과점을 나가는 정난희뒷모습을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의도한 바와 딴판이 되어버린 현실이 아쉬웠다. 남은 유자차를 다 마셔 재껴 정난희명령에 복종했다. 일말의 반항심이 불끈하여 도서관에 가서 공부하기로 마음먹었다. 막 일어서려다 지레 놀라 앉았다. 정난희가 다시 제과점으로 들어왔다. 일회용 비닐우산을 주며 재차 초여름감기를 조심하라고 지시하였다. 문승협은 고개를 크게 끄떡이며 충성을 표했다. 제과점을 나간 정난희와 시간차를 두고 일어났다.

거리에는 아직도 보슬비가 내렸다. 대나무에 파란 비닐을 엮어 만든 우산은 튼실하지 않았다. 그래도 번거로움을 마다하지 않고 사다 준 정난희가 고마웠다. 비닐우산을 펴 들고 터벅터벅 걸었다. 정난희명령을 거스르고 도서관에 가려던 소심한 복수는 어느새 사라졌다. 축축한 옷이 찝찝해 집으로 방향을 잡았다. 집을 나설 때와 감정이 완전히 반대였다. 뭐가 잘못됐는지 돌이켜보았다. ‘보고 싶어서 기다린 게, 이렇게 큰 죄가 되다니’ 억울하였다. 월출산에서 입맞춤까지 했었다. 그것도 먼저 해온 사람이 정난희였다. 예고 없이 나타나면 많이 좋아할 줄 알았는데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정난희는 산행을 다녀오기 전과 후가 달라지지 않았다. 도도함도 예민함도 그대로였다. 여전히 자기 일에 충실한 아이였다. 문승협을 더욱 종잡지 못하게 하였다.

문승협은 문득 의구심이 들었다. ‘사랑을 무기로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 과연 맞는 건가?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이 생각이나 말처럼 쉽지 않구나. 사랑은 심장이 아닌 뇌로 작동해서 환상과 착각에 빠지나 봐’. 사랑을 하면 콩깍지가 씐다는 진리를 깨달았다.

이항리가 흠뻑 젖어 들어온 문승협에게 잔소리를 쏟아냈다. 문승협은 ‘보슬비라 괜찮겠지 하고 도서관에 갔는데, 가다가 옷이 젖어 그냥 왔어’라며 둘러댔다. 들고 있는 비닐우산에 엄마시선이 꽂혀 머쓱했다. 앞뒤가 안 맞는 변명이라 쑥스러웠다. 늘어가는 거짓말에 양심이 찔렸지만 선의의 거짓말이라며 위안 삼았다.

속옷까지 갈아입었는데도 몸이 으스스하였다. 홑이불을 둘러쓰고 공부하다 스르르 잠들었다.

다음날오전, 무용연구소에 가는 길이라며 정난희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제 집에 바로 들어갔는지, 공부는 했는지, 감기는 안 걸렸는지 물었다. 무용대회준비로 바쁘다면서 월말고사 끝난 후에 만나자고 하였다. 전화하겠다면서도 언제라는 말은 빼고 통화를 끝냈다.


월요일아침 등굣길은 이전과 다르게 비장했다. 2학년학급대표회의에서 결정한 학생인권보장 등 요구사항을 학교 측에 전달하는 날이었다. 임창열과 강원종이 2학년대표로 선생들 아침조회시작 전 교무실에 갔다. 역시나 호통을 듣고 일언지하에 거절당하였다. 긴급히 학급대표회의를 소집했다. 혹시 모르니 점심시간까지 답변을 기다리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그럴 이유 없다는 것이 대세였다. 점심시간 10분 후 운동장에 모여 농성에 들어가기로 하였다. 학급대표들이 교실로 돌아가 반아이들에게 전했다.

2학년들이 10분 만에 점심을 해치우고 운동장에 집결하기 시작하였다. 임창열이 어기적어기적 모이는 학생들 모습에 소리쳤다. ‘하기 싫으믄 교실로 들어가, 자율은 보장하께’. 2학년들이 다급히 운동장 단상 앞에 모였다. 미리 준비한 스케치북에 쓴 푯말을 들고 외쳤다.

‘학생인권 보장하라! 성적으로 차별 마라! 폭력을 근절하라! 학교활동의 자유를 달라!’

평소 누적된 불만들이었다. 임창열과 강원종이 번갈아가며 선창 했다. 2학년들이 큰 목소리로 후창 하였다. 교무실반응은 없었지만, 1∙3학년들이 삼삼오오 수군거리며 운동장으로 나왔다. 농성을 시작한 지 10분쯤 흐르고 예보에 없던 이슬비가 내렸다. 비협조적인 날씨를 탓하며 웅성웅성했다. 학생들과 비교적 친한 몇몇 선생이 이때다 싶어 나타났다. 비가 오니 그만 교실로 들어가라고 설득하였다. 개의치 않고 꿋꿋이 주장을 관철하려는 학생들이 있는 반면, 일부는 이슬비에 젖어가자 슬슬 동요했다. 갈팡질팡 눈치 보는 학생들도 있었다. 이번엔 강원종이 외쳤다. ‘언제든 들어가고 싶으믄 들어가, 강요 안 해’. 잠시 후 반별로 한두 명씩 빠져나갔으나, 예상밖의 1∙3학년들이 참여하였다. 3학년 선배가 메가폰을 가져다줬다. 농성인원이 처음보다 두 배 가까이 늘어 2학년들이 힘을 얻었다. 의욕과 달리 빗줄기가 굵어졌다. 앉아있는 운동장에 빗물이 점점 고였다. 학생들이 비에 젖어 마치 물벼락 맞은 모습으로 변해갔다. 임창열과 강원종이 학급대표들을 불러 모았다. 강당으로 옮기자는 의견을 수렴해 알렸다. 운동장에 있던 학생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강당으로 가니, 1∙3학년들이 더 모여들었다. 대략 1,500여 명의 학생이 집결했다. 비로소 선생들이 우르르 등장하여 교실로 돌아가라며 해산을 종용하였다. 학생들은 꿈쩍하지 않았다. 학생부선생들이 당장 철수하지 않으면 징계하겠다고 겁박했다. 지시봉과 몽둥이를 흔들며 위협하였다. 여차하면 강제라도 해산시키겠다는 태세였다. 학생들은 본의 아니게 선생들과 대치했다. 강원종이 메가폰을 입에 대고 결연히 구호를 외쳤다. 학생들이 주먹 쥔 손을 흔들며 이구동성으로 격렬히 구호를 복창하였다. 반면 임창열은 고민에 빠졌다. 참여인원이 늘어나 농성규모가 커지고, 3학년선배들이 있어 지휘에 부담을 느꼈다. 고심 끝에 3학년학생회장에게 통솔을 부탁했다. 하지만 남강선배는 단호하였다. 농성계기와 주축이 2학년인데, 갑자기 학생회가 주도하면 농성목적이 퇴색된다고 다. 또한 학교 측에서 이를 명분 삼아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태세전환할 거라며, 학생들이 수세에 몰려서 질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만에 하나 학교에서 학내지하서클이 꾸민 조직적 폭동으로 몰아가면 방법이 없다는 예를 들었다. 박현선배가 하나 더 덧붙였다. 절대 학칙준수와 비폭력, 자발적 참여와 단결, 순수목적달성만을 강조했다. 3학년도 참여해 절대적 지지를 보내고 2학년 지휘를 받겠다며, 뒤에서 밀 테니 힘내라고 격려하였다. 겨우 한 살 차이 1년 선배여도 생각이 깊었다. 임창열이 아랫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들 말에 일리가 있었다. 스승이 제자들을 폭동으로 몬다는 가상이 믿기지 않았으나, 국가가 시민을 반란군이라며 총칼을 겨눈 것을 목도했었다. 불과 2년 전 겪은 일이라 등골이 오싹하였다. 5.18광주민중항쟁을 간첩이 개입한 폭도로 몰다가, 나중에는 북한군이 투입됐다는 기상천외한 조작과 공작이 바로 엊그제 같았다. 3학년학생회장단지지까지 등에 업고 계속 앞장서기로 마음먹었다.

1,500여 명의 학생이 목청 터져라 외친 구호는 강당을 울린 메아리로 돌아와 더 크게 들렸다. 학생들 가슴에 용기로 꿈틀댔다. 점심시간종료종소리와 함께 1차 농성을 해산했다. 저녁식사시간 다음 농성을 기약하였다.

선생들이 5교시수업부터 학과진도를 내팽개친 채 갖은 감언이설로 설득과 회유를 시도했다. 나중에 경위를 조사해서 강력한 징계를 내리겠다고 협박도 하였다. 2차 농성을 막으려고 다방면으로 애썼지만, 학생들은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저녁농성에는 각반교실을 지킬 당번 1명을 제외한 전교생이 집결했다. 학교는 초긴장 상태에 들어갔다. 학교재단이 나서 교무회의를 주도하기에 이르렀다.

저녁시간이 끝나갈 무렵, 재단기획이사와 교장선생이 단상에 올랐다. 내일 아침 교무회의시간에 2학년학급대표들과 간담회를 제안하며 대화를 통한 해결노력을 약속하였다. 학생들이 어찌할 바 몰라 웅성거렸다. 임창열이 급히 2학년학급대표들을 모아 의논했다. 학생들은 와중에도 ‘학생인권 보장하라’며 구호를 외쳤다.

임창열이 논의를 마치고 대열 앞에 섰다. 책임을 다해 간담회에 임할 테니 학급대표들에게 맡겨달라고 하였다. 남강과 박현선배가 일어나 동조하자 3학년에서 박수가 나왔다. 곧이어 전교생이 박수로 동의했다. 임창열이 참여해 줘서 감사하다는 인사와 더불어 질서 있는 해산을 부탁하였다.

다음날 2학년학급대표들이 평소보다 1시간 일찍 등교했다. 요구사항이 다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마지노선을 재차 확인하였다. 대표발언권을 임창열에게 주기로 했다. 시간이 되어 교무회의실로 갔다.

임창열이 정서한 내용을 학교 측에 제출하였다. 부언하여 답변 역시 서면으로 받기를 희망했다. 재단기획이사가 입꼬리를 올리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봐도 같잖다는 비웃음이었다. 제목부터 트집 잡았다. ‘건의사항이라고 써야지, 건방지게 요구사항이 뭐야’라며 빈정댔다. 다 읽고 나서는 혼잣말처럼 ‘어디 학생들이 싸가지없게, 학교에 답변을 서면으로 달라냐’고 비꼬았다. 대화에 먹구름이 끼고 결과예측도 어려웠다. 2학년학급대표들이 위축되었다. 재단이사와 교장선생이 앞장서 질문하였다. 2학년 2반 담임과 학생부선생들이 합세했다. 임창열이 주로 답변하고, 강원종이 부연설명을 이어갔다. 학생들 의견을 듣겠다는 간담회가 아니었다. 마치 피의자를 보호하려 짜고 치는 판검사들 앞에선 법정 같았다. 피해자가 오히려 취조받는 분위기였다. 특히 재단기획이사가 멸시에 가까운 호통으로 일관하였다. 임창열이 대표발언권자로서 몰매를 맞았다. 학생인권을 존중받으려 나선 대화는 낙담과 좌절이었다. 문승협이 말없이 지켜보다 임창열에게 귀엣말을 했다. 임창열고개가 끄떡이자 손을 들었다. 벌렁벌렁한 가슴에 식은땀이 날 정도로 바짝 긴장하였다. 교장선생이 재단기획이사눈치를 살폈다.

“교장선생님, 제가 한 말씀드려도 될까요?”

“뭔 말인디?”

“오늘 간담회를 열어 대화로 해결하자고, 어제 전교생 앞에서 말씀하셨잖아요?”

“잉, 그래서 느그들이 여그 앉아있잖애.”

“근데 저희는 이런 식이 대화라는 걸 처음 알았습니다.”

“시방 뭔 소리냐, 이것이 대화가 아니믄 뭐시어?”

“저희는 대화라기보단 죄지어서 혼나는 느낌입니다.”

“대화하다 보믄, 선생님들이 야단도 치고 가르치기도 하고, 그러는 것이 대화제 뭐시대?”

“저희들이 배운 바로는 이런 방식은 대화가 아닙니다, 자녀분들과 대화할 때도 이렇게 하시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혹시 주종관계처럼 여겨 그러신 건 아닌지, 저희를 너무 막 대하시는 모습에 실망이 큽니다.”

“…….”

“과연 지금 이 순간에 저희들이 뭘 배우고, 어떤 점을 본받아야 할지 혼란스럽습니다.”

“내가 느그들한테 배우라고 했냐 뭐라 했냐, 쓸데없는 소리 하고 있어.”

“교장선생님, 저희들은 엄연히 학비를 냅니다. 돈 내고 맞으면서 학교에 다니고 싶은 학생이 있을까요? 저희는 대단한 걸 원하는 게 아닙니다, 단지 선생님들에게 학생다운 대우를 바랄 뿐입니다. 학교를 즐겁게 다니고, 미래의 꿈을 찾고, 꿈꾼 목표를 위해 학생답게 노력하고 싶습니다. 저희들은 선생님들을 비난하러 온 게 아니고, 우리를 이렇게 좀 대해주세요라는 말을 하러 온 겁니다. 그게 얼마나 잘못된 일이기에, 이런 모욕적인 인신공격까지 받아야 한단 말입니까?”

“누가 누굴 인신공격해야, 저 놈이 생사람 잡네?”

“저희는 학생대표로 와있고, 오늘 대화를 학생들에게 알릴 의무도 있습니다. 그래서, 대화록을 기록하고 있는데요. 지금까지 기록을 보면, 망할 놈의 자식들, 썩을 놈들, 병신 같은 자식들이란 말 투성입니다.”

“그 그건 말하다가 화나서 한 혼잣말이잖애, 선생님들이 그 정도도 못하냐?”

“그러면, 기록한 내용을 있는 그대로 학생들에게 공개해도 될까요? 그게 아니라면, 저희들을 조금만 존중해 주시길 정중히 부탁드립니다.”

선생들은 한 번도 권위에 도전받아본 적이 없었다. 눈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감히 말대꾸조차 못하던 학생들이었다. 두 눈 똑바로 뜨고 또박또박하게 할 말 다하는 태도에 기가 막혔다.

그런데 교장선생이 잠시 생각하는듯하더니 한발 물러섰다. 잘못을 인정한 것은 아니었으나, 본의 아니게 심한 부분이 있었다며 앞으로 신경 쓰겠다고 했다. 다시 학생들 의견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대화를 이어갔다. 하지만 협상이라기엔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다. 학생인권보장과 폭력근절, 성적으로 학생차별 금지와 학교활동자유 등은 전부 무시됐다. 기본의 언어들이 근접할 수 없는 거창한 뜬구름이 되어버렸다. 이번 사태에 대한 선생들의 반성과 체벌금지는 어느 정도 수용하였다. 방식은 학교에 일임하라고 했다.

임창열이 받아들인 사항과 방식을 서면으로 달라하였다. 학교는 그냥 믿으라며 일언지하 거절했다. 전교생 특별조회시간을 열어 교장선생훈화시간에 표명하겠다며, 공개석상 발언이니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하였다. 간담회대화내용도 일체발설금지시켰다. 학교 측 일방결정이었으나, 학생대표들은 달리 방법이 없었다. 처음부터 협상이란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다음 주 월말고사 때문에라도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다음날아침 운동장에 도열한 전교생이 연단의 교장선생을 주시했다. 월요아침조회 때 빨리 끝나길 바라며 산만하던 평소와 달랐다. 다들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무슨 말을 하는지 귀 기울였다.

“선생님들이 제자들을 사랑하는 마음에 매를 들었는디, 그 사랑의 매가 과한 점은 유감스럽습니다.”

“염병, 사랑한디 으째 때린다냐?”

“유감? 유감이 뭔 뜻이대?”

“그렇다고 학생들을 지도하는데 체벌을 완전히 없애는 건 불가능하니, 앞으로는 가급적 직접체벌은 자제하되, 불가피한 경우는 간접적으로 벌을 주는 선에서…….”

“뭣이어, 앞으로도 계속 때린다는 거여 만다는 거여?”

교장선생훈시 중에도 학생들이 동요하며 웅성거렸다. 선생들은 대열에서 떠들지 못하도록 엄포 놓기에 바빴다. 그동안 표정 없이 지낸 김생출선생만 유일하게 아리송한 미소를 지었다. 임창열과 2학년학급대표들이 고개를 떨구었다. 학생들 대부분 걸쩍지근한 표정이었다. 조회가 끝난 후 교실로 들어가면서 끼리끼리 한 마디씩 하느라 시끌벅적하였다.

“아야, 내용이 영 만족스럽지 않은디?”

“그래도, 선생들이 학생들한테 사과 비스무리하게 한 것은 그나마 처음일 것이다.”

강성학생들이 불만을 표출하며 2학년학급대표들에게 물러터졌다고 비판했다. 결과에 수긍하는 온건학생들은 그나마 최선의 결과라며 자위하였다. 달리 방법이 없는 2학년학급대표들 입장을 이해했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학생들에게 불안과 긴장의 연속이었다. 한 가지 확실한 깨우침은 있었다. 뭉쳐서 목소리를 내면 만족스러운 결과가 아닐지언정 분명 뭔가 얻는 것이 있었다. 행복까진 아니더라도 학교생활에서 활기를 찾는 분위기 전환에는 성공하였다. 친구들과 함께하여 힘이 되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잘못했다 미안하다는 사과는 아니었으나, 처음으로 학교가 학생에게 유감표명이라는 형식을 취한 것은 성과였다. 이밖에도 몇 가지가 바뀌었다. 학생회를 통해 의견을 수렴하고 경청하는 간담회가 정례화됐다. 심한 경쟁유발과 수치심을 주는 성적벽보게시를 개선하였다. 각학년게시판에 문이과별 전교 50등까지만 붙이기로 했다.

교육제도가 성적으로 서열을 세우는 이상 경쟁은 당연지사지만, 극심한 경쟁을 부추기는 교무실벽 성적게시가 커닝발생원인 중 하나였다. 전교생성적이 붙는 날이면, 교무실이 인산인해로 복잡해 선생들도 불만이었다. 각학년끼리 반별경쟁을 부추기는 반평균성적과 개인별 전교등수게시가 없어지면서 관심 있는 학생들만 찾아봤다. 선생들도 반성적에 스트레스가 줄어들었다.

문일고농성은 외부에 알려질 수밖에 없었다. 목포시 각급학교들이 학생회와 대화에 나섰다. 눈에 띄진 않았으나 학생인권개선이 한 발짝 내디뎠다. 학교와 학생 간 잘못된 관습과 인식이 조금은 나아졌다. 하지만 학교생활곳곳에 심각한 문제가 내재되어 있었다. 학교폭력과 따돌림 등에 괴로워하는 학생들이 숨죽여 울었다. 학교가 삶의 전부인 학생에게 여전한 지옥이었다.


금요일 국민윤리시간, 김생출선생이 비교적 환한 얼굴로 들어왔다. 아무 말없이 칠판에 ‘歷史’를 크게 썼다. 아니나 다를까 문승협을 호명하여 최근 기억에 남는 뉴스가 무언지 물었다.

“선생님, 요즘 고등학생들이 뉴스 볼 시간 있을까요?”

“저런, 너희들에게 그런 여유조차 허락하지 않는 현실이 무척 슬프구나.”

“선상님, 갑자기 뉴스는 왜요?”

“왜요는 일본 요다, 한국 이불을 쓰도록 해.”

“하하하.”

“어제 우리나라 문교부가 일본정부에 역사교과서 왜곡을 시정하라고 요구했다.”

“하여튼 쪽발이새끼들은 문제여 문제, 반성을 안 해, 싸가지없는 새끼들.”

“그런데 말이야, 오늘 일본 오가와헤이지 일본문부상이 내정간섭이라며 반발했어.”

“적반하장도 유분수제, 확 싸다구를 쳐불란께.”

“그래, 후안무치한 일이지.”

“음마, 후안무치가 뭔 말이다냐?”

“뻔뻔하다는 말이여, 니멩키로.”

“자, 여기서 다음 주 월말고사시험문제를 알려주겠다.”

“아그들아, 진짜 시험에 나온께 언능 받아 적어라잉.”

“문승협,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누가 한 말이냐?”

“단재 신채호선생님이요.”

“그건 출처가 불분명한 대답이다, 윈스턴처칠이 했다고도 하지만, 이 또한 정확하지 않다.”

“그럼 왜 물어보신 건가요?”

“그냥, 선생님은 그냥 물어보면 안 되냐?”

“하하하.”

“선상님, 그럼 시험문제는 뭐다요?”

“아야, 니는 시험문제만 중하냐, 역사를 기억하라는 말이 중하제.”

“이번 시험문제는, 우리나라를 침략하고도 역사를 왜곡하는 국가다.”

“아따, 이번에도 최소 국민윤리 한 문제는 맞히겄다잉.”

“이렇게 입에 떠 넣어줘도 못 먹는 놈들이 있드란께.”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알았나?”

“예.”

“그리고, 한국민주주의역사에 큰 획을 그은, 지난 5.18광주민주화운동을 늘 기억해라.”

“네.”

“선상님, 갑자기 광주민주화운동은 뭣담시요?”

“내가 이번에 너희들 농성하는 걸 보고 느낀 점이 많다, 애기로만 알았는데 많이 컸더라.”

“아따 선상님, 사타구니에 시커멓게 털 난 애기 봤소?”

“허허허, 어디 한번 보자.”

“우하하하, 아야 빤스 벗고 한번 보여드려.”

“허허, 이 세상에 첫술로 배부른 건 없다, 그렇게 하나씩 민주주의를 배워가는 것이다.”

“민주주의, 민주주의, 민주주의.”

“다만, 민주주의를 너무 신봉해서도 안 된다.”

“으째서라우, 민주주의는 과해도 나쁜 것이 아니라고 했슴서.”

“독재에 저항하면서도 자기 학습을 통해 독재를 배우게 되고, 계속된 자기 검열에도 불구하고 자신도 모르게 스며드는 건 인간인 이상 막을 수 없다. 그래서, 적절한 균형이 필요하다. 균형, 균형도 절대 잊지 마라.”

“왐마, 기억할 것이 너무 많은디.”

“선상님 말씀대로 다 기억할란께는, 허벌라게 많아서 대가리가 깨질라 하요.”

“그 정도는 괜찮아, 너희들 뇌는 계속 성장하니까.”

“뇌는 계속 성장한디, 내키는 으째 멈췄으까잉.”

“그리고, 앞으로 너희들을 동등하게 생각해서, 해라 마라 이런 명령조말은 안 쓰겠다.”

“김생출선생은 그 말을 꼭 기억해라!”

“하하하, 허허허.”

김생출선생은 스승의 권위를 버리는 대신 기특한 제자들을 동지반열로 격상시켰다. 이번 사건이 학생들 자력으로 농성을 결정해서 학생인권보장과 차별금지를 외치고, 요구사항 관철을 위한 합의를 배운 산교육이라 생각하였다. 그동안 선배들의 민주화운동을 보고 들었고, 비록 서툴더라도 은연중에 배워 자기 것으로 발전시킨 제자들에게서 희망을 보았다. 다행히 우울하던 나날이 밝게 걷히고 웃음을 되찾았다.


토요일오전수업이 끝나자, 문승협은 정난희에게서 전화 올까 싶어 바로 집으로 갔다. 등교할 때만 해도 없었던 편지가 대문우편함에 꽂혀있었다. 열일한 우체부아저씨에게 감사했다. 보내는 사람이름이 낯설었다. 방으로 들어가 가방을 내려놓고 편지봉투를 개봉하였다. 편지지 안에 사진 2장이 동봉되어 있었다. 한 장은 남자가 요트를 배경으로 앉아있고, 남은 한 장은 정난희와 월출산등산 가서 찍은 사진이었다. 요트 위 남자는 사진을 찍어줬던 아저씨였다. 반가운 마음에 편지지를 펴 읽었다. ‘선남선녀 예쁘게 잘 만나고, 올일 있으면 꼭 연락하라’는 간단한 내용이었다. 아저씨사진은 내려놓고 정난희와 찍은 사진을 한참 바라보았다. 거실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얼른 사진과 편지를 추억상자에 넣었다. 정난희와 월출산으로 등산 간 것이 들킬까 봐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태연히 거실로 갔다. 막냇동생 문윤아가 밖에 나가고 있었다. 거짓말은 언제나 불편했다. 다시 방으로 들어가 내친김에 펜을 들었다. ‘정난희와 잘 만나고 있으며, 예쁘게 잘 찍어준 사진 감사하다’고 답장을 썼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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