닿을 수 없는 타인의 세계

by 세템브리니

“위이이잉.” 달게 자고 있는데 전화 진동이 울렸다. 도서관 열람실에서 복도로 나가려면 거리가 있다. 5분만 더 자고 싶은 마음에 휴대폰을 꺼두고 다시 엎드렸다. 잠시 후 또다시 진동. 이번엔 메시지였다. 혹시 급한 일인가 싶어 열어보니 “자갸”라는 한마디. 결혼한 지 10년이 넘었지만, 이렇게 단순히 부르는 메시지는 거의 없다. 무슨 일인가 싶어 답장을 보냈다. 곧 전화가 걸려왔다.


아내는 오늘 외국 손님과 저녁 약속이 있는데, 회사 카드를 집에 두고 나왔다고 했다. 퀵을 부를 테니 지갑을 보내 달란다. 점심을 먹고 집에 들렀다가 도서관에 온 지 30분도 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당장 가 달라는 말에 은근히 짜증이 치밀었다.


“나 방금 집에서 왔는데?” 그러자 아내는 조금 미안한 기색으로, 늦어도 4시까지 보내 달라며 전화를 끊었다. 자리로 돌아오며 속으로 따졌다. 미리 카드를 챙기지 않은 아내의 실수, 그리고 나의 시간을 끊는 요청. 나는 직장은 아니지만, 아침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며 하루를 보낸다. 나름의 ‘일과’가 있는 셈이다. 그러니 부탁이라면 더 정중했어야 하지 않았나.


하지만 곧 다른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아내는 오늘도 직장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퇴근 이후까지 이어질 업무를 위해, 내 도움이 필요하다. 반면 나는 일을 하지 않는다. 글을 쓴다는 이유로, 내가 좋아하는 읽기와 쓰기를 한다. 아내가 만드는 물질적 토대 위에서 나는 하루를 보낸다. 그렇게 보면, 아내의 요청은 정당했고 나의 짜증은 그만큼 정당하지 않았다.


감정은 상황 앞에서 금세 힘을 잃었다. 읽던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를 덮고 책갈피를 꽂았다. 시계는 오후 1시 50분. 약속된 시간까지 2시간 남았다. 오늘은 30분이나 일찍 와서 칸막이가 좋은 자리를 잡았는데, 일찍 집에 가야 한다는 생각에 억울함이 다시 스쳤다.


점심은 옛 직장 선배이자 친한 형과 먹었다. 그는 최근 수소차 연료 소재를 만드는 회사에 들어갔다. 식사 후 카페에서 형이 물었다.

“너 멀쩡한 회사를 왜 그만뒀냐?”

여러 번 들어서 지겨운 질문이었다. 퇴사한 지 6개월이 다 되어가는데도 그는 같은 말을 반복했다.


형의 사정을 알기에 이해는 갔다. 그는 재작년까지 대기업 계열사 대표였다가 계약이 끝나고 한동안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다. 심지어 내가 다니던 회사에도 지원했지만 결과가 좋지 않았다. 그런 형이 보기에, 안정된 직장을 스스로 내려놓은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글을 쓰고 싶어서 그만뒀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왜 똑같은 질문을 계속하냐”라고 물었다. 형은 그런 이유로 퇴사한다는 걸 납득할 수 없다고 했다. 나는 “직장을 구하고 싶지만 못 구한 시간”과 “직장을 구하지 않는 시간”은 다르다고 말하며, 사람은 타인의 상황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그건 최근 읽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서 얻은 생각이기도 했다. 칸트는 나의 주관성에서 벗어난 ‘물자체’는 인식할 수 없다고 했다. 형의 경험과 인식으로는, 글을 쓰기 위해 직장을 떠난 나를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 답답하지만 수긍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입장에서 세상을 본다.


형도, 아내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둘 다 결국 타인이다. 그들의 자리에서 보면, 내가 그들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고 느낄 것이다. 40년을 살아오며 매일 부딪히는, 그러나 결코 메울 수 없는 나와 타인의 거리. 오늘도 그 간극은 감정의 형태로 다가왔다.


현재 시각 오후 2시 50분. 가방을 챙긴다. 오늘 오후의 계획을 접는다. 내가 조금 일찍 집에 가서 카드를 보내주면 아내의 하루는 조금 덜 복잡해질 것이다. 완전한 이해는 불가능하지만, 그 불가능 속에서도 우리는 서로를 위해 무언가를 한다. 그 반복이, 불완전한 우리를 조금 덜 낯선 존재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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